이상개 시집/이상개 시전집·소금을 뿌리며

이상개 시선집/소금을 뿌리며

송제 이상개 2011. 4. 20. 12:24

-이상개 시선집-

소금을 뿌리며

2001.5.20

도서출판 해성

신국판 216쪽

가로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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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개 시선집

 

 

 

소금을 뿌리며

 

 

 

 

 

 

 

 

 

 

 

 

 

 

 

 

 

 

 

 

 

 

 

 

 

 

 

 

 

 

 

 

 

 

 

 

 

 

 

 

- 제1시집 -

영원한 평생 1970

 

 

 

 

 

 

 

 

 

 

 

 

 

 

 

 

 

 

 

 

 

귀향 길에 쓴 詩

 

 

 

쑥 내음 돋아

바람 싣는

양지.

 

꽃뱀의 잔등에선

봄볕이

불붙는다.

 

아지랑이 속으론

세상.

 

분명 나는

이승으로

잘못 걸려 온 전화나 아닐까.

 

 

 

 

 

 

 

 

 

 

 

 

 

 

 

가을 햇빛의 詩

 

 

 

잎 진 가지 끝에

붐비던 잔광(殘光)의 물결이

 

물살 빠른 내의

조약돌 씻는,

 

솔개 한 마리

빈 원을 그리는 한낮 -

 

눈빛 고운 이의 이마에

조용히 건너가는 빛살의 파동

 

피가 배인 따스한 웃음의

그대 눈부신 얼굴을 본다.

 

 

 

 

 

 

 

 

 

 

 

 

 

 

 

 

꽃을 보는 마음

 

 

 

연꽃 속의 심청이처럼

꽃이여 너는

내 아가씨를 돌려다오.

 

날마다 빈방을

말끔히 가꾸어 놓고는

자취도 없이 숨어 있다가.

 

저녁답 -

하루의 내 피로까지도

은은한 미소로 씻어주는

 

꽃이여

너는

내 아가씨를 보여다오.

 

 

 

 

 

 

 

 

 

 

 

 

 

영원한 평행

 

 

 

사는 것이 낙일 수 있지만

사는 것이 낙일 수도 없는

허기진 세월을

 

땡볕에 못이겨선가

한 아름의 사상들이

꽃잎을 떨군다.

 

우러러

사무친 한을

풀길 없는 이 하늘

 

차갑고 더러운

배신의 강물 위로

노을이 번지는데,

 

아, 살아서 눈 먼 사람들이

죽음인들 바로 보일까.

 

통곡의 벽에까지 달려가

피울음을 쏟아 붓고도

번갯불이 갈래갈래 끝에선

번쩍이는 핏방울들.

 

모든 흔적까지도 삼키고도

오히려 태연할 수 있는 목숨들을 위하여

살아나는 의지의 무덤 가에서

죽음을 일깨우는 바람이 인다.

우리에겐

영원한 평행으로 다스리는 형벌이란

세월을 누빌 사랑의 물살이 친다.

 

 

 

 

 

임종

 

 

 

- 비로소

습성의 잿더미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는 너

유일한 심판이여

 

간절한 소망처럼

어두운 미래를 밝히는

우리,

죽어 가는 괴로운 사람에게

따뜻한 거짓말 하나라도 보태자.

 

- 결국은

우리의 생활도

조금씩 변형을 일으키면서

미래를 떠받치는

확신으로 채색된다고….

 

 

 

 

 

햇볕에 타는 詩

 

 

 

처음,

부끄러운 사람끼리 비비던

눈웃음의 물결로 건너 왔으나

밝아 오는 무덤의

가장자리만큼

잠 안 오는 밤까지

꽃불로 밝히더니

죽어서도 눈감지 못할

그리움을 지녔네,

날아도 날아 보아도 닿지 않는 하늘 끝

詩로서나 풀릴 건가

내 목숨은,

오늘도 햇볕에 모조리 탄다.

 

 

 

 

 

 

주형제작(鑄型製作)

 

 

 

살을 닦고 뼈를 깎는 보람은

따분한 침묵을 용해한 체험 뿐

 

산을 밀고 생성(生成)의 숲을 도망쳐 나와

현대의 문지방을 핥는

거세된 계절들

 

재질은 탄력 있는 자세로 여유 있어도

심장을 도리고

의상을 찢어 내면

기초 곡선과 포물선 정점에서부터

변신하는 이데아의 골격이 된다.

 

나신의 검은 피부가

거칠게도 용광로의 융해열을 꼽아 보다가

하나의 추상으로 자라잡고,

어느 후예의 자손은

미묘한 흥분의 틈새에다

독한 소주를 붓고

 

차라리 천 개의 의지로 된 우상 앞에는

퇴색한 삶이 햇살 퉁기리라

고립(孤立)의 성벽 헐린

미래를 보는 구도

너부죽이 열을 삼키는 분만(分娩) 앞에

숨결과 지문(指紋)이 찍힌 화석을 남긴다.

 

 

 

 

첫사랑

 

 

 

운명의

어우를 수 없는 한계점에서

피를 쏟아 붓고,

 

우리 모두 취해서

울며 돌아서는 길.

 

내 살 속에 묻어 있는

네 피는 지울 수가 없다.

 

나의 전부는 그렇게

몽땅 사라져 갔으니,

 

이젠 죽음도 부끄럼 없이

쉽게 바로 맞을 수가 있다.

 

 

 

 

 

 

 

 

 

- 제2시집 -

만남을 위하여 1985

 

 

 

 

 

 

 

 

 

 

 

 

 

 

 

그 말

 

 

 

아무도 나를 비웃지 못하는 그 말

최후의 등불로 눈먼 길을 밝혀주는 그 말

가르쳐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그 말

내가 나를 더욱 의롭게 살찌게 하는 그 말

내 목숨 불질러도 살아있는 목숨의 그 말

너와 나 아니면 썩을 뿐인 빛의 그 말

골백번보다는 단 한번으로 넉넉할 그 말

끝내는 주어야하지만 곱게 간직하고픈 그 말

죽음으로도 바꿀 수 없는 따뜻한 그 말

그 말, 그 말, 아 사랑한다는, 그 말

 

 

 

 

 

 

귀항시초(歸港詩抄)

 

 

 

<Ⅰ>

터져버린 고무풍선이 되어

뒤집히던 바다

구리빛 살결의

억센 사나이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앞세우고

파도를 껴안고 돌아온다

내항(內港) 깊숙이 닻을 내리고

싱싱한 비늘을 털어 내는

그들의 휘파람 소리

투망처럼 깔린다

 

 

<Ⅱ>

항구의 어둠을 다스리는

석류알들이 웃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

흰 눈썹을 뽑아 든

허무의 그림자들이

비탈길에 쓰러지고

비린내 나는 바람을 걷어내며

억센 사나이들의

깊은 잠 속을 뜨거운 소나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인장(印章)

 

 

 

지리산 대신 집어 온

돌멩이에서

흰 눈발이 듣고(滴) 있다.

내 이름을 깔고 앉은

지리산의 무게여

일생을 찍어내기엔

내 이름은 너무 얇구나.

흰 구름 밭

철쭉꽃은 만발하고

둥 둥 떠가는 산.

빛만 남은 무게를 껴안고

한 사내의 피가

몸부림을 할 활 태우고 있다.

 

 

 

 

 

 

 

 

 

산행(山行) ․ 5

 

 

 

내 땀을 짊어지고 오른

지리산 천왕봉은

비구름에 쏠려 빛난 바윗돌.

오늘 밤 별이 되는 기쁨을 품고

내 땀은 하늘로 올라간다.

생약(生藥)의 바람과 물소리를 거느리고

햇살을 씹는 내 죽음의 힘 앞에서

대소 군봉(群峰)들은 발아래 엎드리고

제 발부리가

세상 문 앞까지 뻗어 있을

대죄(待罪)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혼들아

나 죄를 묻지 않는다.

 

 

 

 

 

 

 

 

 

 

 

 

비상

 

 

 

비상 사이렌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나체로 질주하는 호각소리가

장검을 휘둘렀다.

소등을 끝낸 집들은

방공호 위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당대로 끝마쳐 줄 비극을,

일생의 우여곡절들은

언문일치를 부르짖으며 집합하고

무장한 독립군 병사가 되어

다시 한 번 포복을 배우고

증오와 갈등 속에 고난을 익힌다.

배우고 익힌 것은 따로

유산으로 남기리라.

상황판 위로 투입 배치 완료되는

일상의 점등(點燈)

새벽하늘이 유난히 차고 푸르렀다.

 

 

 

 

 

 

 

 

 

 

 

 

 

 

각서(覺書)

 

 

 

포도주는 피다 술이다.

이 술 저 술 퍼마시다 보면

나란 놈은 어느 새

이 피 저 피 섞인 잡놈이 된다.

잡놈을 잡놈으로 아는 여자여

너도 잡년이다.

술을 팔아 피를 팔아

술을 빨아 피를 빨아

잡놈과 잡년들은

서로 돌을 던지지만

미약(媚藥)의 불씨로

내 몸을 불 질러도 돌아오지 않는

오, 숙성한 나이여

이젠 우라늄보다 진한

고요함이 있어야겠다.

 

 

 

 

 

 

 

 

 

 

 

 

 

 

 

환청(幻聽)

 

 

 

보이지 않는 하늘

쩡 갈라져 내리는 소리는

어디서 날아오는가.

 

눈송이의 기침소리가

나목(裸木)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새벽

 

언 江을 건너다

군도(軍刀)에 잘려진 말굽소리만

설친 잠의 피 속으로 떠내려 왔지

 

느닷없는 기총소사(機銃掃射)에

무너져 내리던

소리 소리 소리여

 

어둠 속에서도

썩지 않는 빛의

내 목소리를 돌려다오

돌려다오.

 

 

 

 

 

 

 

 

 

 

우연한 만남

 

 

 

꿈속에서도 헤어져야 하는

숙명의 흰 꽃잎이 떨어진다.

몇 밤을 자고 나도 자고 나도

꽃 속의 잠은 꿈을 씹고 있을 뿐.

소인(消印) 없는 편지도 끊어지고

마른하늘 번갯불

황홀한 스침만 남아

돌아섰다 돌아서고 돌아섰다 돌아서고,

무덤가를 돌고 도는 바람으로 남아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내 전생이 떠나옴을 바라보고 있다.

 

 

 

 

 

 

 

 

 

 

괴로움이란 괴로움

잘 썩히고 나서

한 송이 꽃이 핀다.

 

그늘 속에서 태어나

목청을 틔우는 바람

그 땀 빛에 젖어 우는 새.

 

칭 칭 감긴 몸부림 찢어 뿌리며

말갛게 말갛게 씻은 몸뚱이

아픔을 새겨, 삭여 피는 꽃들아.

 

내, 이제 눈감고도 알겠다

잘 썩은 괴로움만이

은은한 향기를 피운다는 걸.

 

 

 

 

 

 

 

 

 

 

 

 

 

 

 

신인간론(新人間論)

 

 

 

만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할 것

우선, 투계(鬪鷄)처럼 빳빳한 적개심을 가지고 대적할 것

아무도 믿지 말 것, 믿는 자는 사형(私刑)을 가할 것

독종이 되어

원수를 더 많이 만들고 씹어먹기

증오를 잘 닦아서 패물처럼 간직할 것

될 수 있는 대로 함정을 많이 파두고

올가미는 사방에 갈아 둘 것

엉터리 주문도 몇 개쯤

독침도 몇 개쯤

죽음도 믿지 않는

정직하게 타락하는 한 마리 불개가 될 것

얼음바늘로 손톱 밑을 찔러가면서

냉혹하게 어짊을 매질하고 반성 할 것.

 

 

 

 

 

 

 

 

 

 

 

 

 

 

 

 

만남을 위하여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오늘도

내, 그대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는 별이 되는

하나의 이름으로 반짝이면서

그대와 내가 만난

최초의 아픔과

최초의 굶주림을

뼈 속 깊이 깊이 새기면서

이 세상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나 이루리라

이루리라 다짐하면서,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오늘도,

내, 그대를 만나야 한다.

만나야 한다.

 

 

 

 

 

 

 

 

 

 

 

 

 

언제나 타인

 

 

 

만나는 우리는

언제나 타인.

다디단 굶주림을 키우기 위하여

독버섯을 뜯어먹는

차디찬 범행을 서슴지 않는다.

모든 만남의 새로움이란

노상강도 같은 것

아름다운 과거로 가는

지름길에서,

만나는 우리는

언제나 타인.

 

 

 

 

 

 

 

 

 

 

 

 

 

 

그리움

 

 

 

뜨거운 말까지도 가라앉는

영혼의 밑바닥

불볕으로 몸을 씻고

조용히 끓어 앉으면

아, 어느 하늘 아래서도

날아드는 너의 외로움

씹는 이 버릇.

 

 

 

 

 

 

 

 

 

 

 

 

 

 

바람 타기

 

 

 

미간(眉間)으로 파고드는 별 하나와

오늘 흘린 눈물이 만나고 있다.

썩힌 반생의 나이를 지우는

남은 반생의 믿음 하나가

난행(亂行)당한 불빛 속을 걸어가고 있다.

치뜨며 일어서는 헛맹세란 놈 때문에

매양 바람만 타는 세상

하얀 소멸(消滅)을 건지기 위하여

모래라도 십고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미간(眉間)으로 파고드는 별 하나와

오늘 흘린 눈물이 만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을 위하여

 

 

 

부질없이

누가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가

하나의 벽을 허물고

살을 도려내고

하나의 이름가지 뭉개버리고 나면

어디로 떠나가서 정착할 것인가

하얀 별똥이 떨어질 때마다

무엇이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무엇이 더럽고 독한 것인지

정직함을 믿고

이제는 더 이상 감추지 말자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이 그 무엇이든

분명한 자취를 남기면서 일어서는 순간부터

무심한 바람이 되어 흐를 뿐이지만

안타까움에 불을 지피는 여유로 해서

존재의 무가치를 증명이나 하듯

더욱 더 당당해 지는

한 줄기 녹슨 햇빛을 바라보노라면

어디선가 들리는

은은한 종소리.

 

 

 

 

 

 

 

 

 

 

낮달

 

 

 

타관으로만 떠도는

멍텅구리.

 

장돌뱅이

피륙 같은 빛살을

산적놈에게 털리고

가는 철사줄로

꽁꽁 묶인 가슴은

때로는 어둠이 친족보다 그리웠다.

 

어디서 마른번개는 잠들고 있는지.

믿는 놈에게 발등이나 찍히고,

 

밀물 썰물에도 갈앉지 못한 채

강가에 밀려나온 석은 말뚝처럼 서서

울컥 울컥 치뱉는 각혈(咯血).

 

춘삼월,

싸락눈 매운 회초리

누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낮달 하나.

 

 

 

 

 

 

 

 

- 제3시집 -

흐르는 마음 하나 1989

 

 

 

 

 

 

 

 

 

 

 

 

 

 

 

 

 

 

 

 

 

 

 

 

 

 

 

 

 

 

 

가위

 

 

 

우리들의 동침(同寢)은

남남이라는 만족으로 평화롭다.

한 때의 만남으로 인사를 나누고

차디찬 강철 날이 되어 갈라서지만,

넉살좋게

오색 테이프를 끊을 때가 오면

죽이 맞아 어깨동무.

모르는 만남의 새로움을 씹다가

식중독으로 쓰러지는 것도

자유라면 자유다.

동강난 신념을 털어 버리고

대각선으로 달아나는

오, 조숙한 타락이여!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라!

 

 

 

 

 

 

 

 

 

 

 

 

 

 

 

 

쾌지나 칭칭

 

 

 

내일은 쾌청하리라는

일기예보는 믿지 않는다 해도

꽃가루받이 끝난

몇 마디 사투리일지라도

충실한 낱말로 길들이면서

능금알처럼 자유롭게 익어갈 수 잇게

한 짐 베어 온 햇살 골고루 갈아두세

이미 허용치를 넘어선

오염된 배기가스 속에서

낙과(落果) 될 수도 있는 낱말의

그 불투명한 운명을 위하여

더 이상 무엇을 갈무리 하리오.

점은 지성(知性) 위에 떠도는

아름다운 죽음을 되새기면서

포기할 게 없는 것이 더욱 서러워

노을 지는 언덕을 울면서 가는 바람

절망의 곁가지를 잘라내면서

수백만 촉광의 빛을 뿌리는

조명탄 같은 꽃송이들아

내일은, 내일은 쾌청하리라

쾌청하리라.

쾌지나 칭칭 나네.

 

 

 

 

 

 

 

 

고약

 

 

 

뭉쳐야 산다고 배워 왔었다.

그러나

뭉쳐서도 한꺼번에 망가지는 걸

똑똑히 똑똑히 보아 왔었다.

시는 삶의 목적인가 수단인가를

확인하는 도중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만이 느끼는

저 힘차고 끈끈한 뿌리.

다이너마이트나 폭탄으로도

깔아뭉갤 수 없는 처방을 내린다.

오, 절망의 뿌리 깊은 꿈이여

힘차고 끈끈하게 뭉쳐야 한다.

 

 

 

 

 

 

 

 

 

 

 

 

 

반문(反問)

 

 

 

가야 할 일이 남아 있고

가기 전에 할 일이 남아 있고

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돌아와서도 할 일이 남아 있다면

남아 있다면.

혁명도 자유도 재벌도 정치가도 사랑도 아닌

밥통같이

시 쓰는 일 뿐이라고 까놓고 말하겠지만

말하겠지만.

뼈 속에서 울리는 징소리를 밟고 가서

약속 받고 보장 받는 일도 아니지만

큰 일 한다는 이에게 묻노니

큰 대답 한번 듣고 싶구나.

귀속의 때 말끔히 씻어내는 답변

꼭 한번 듣고 싶구나

듣고 싶구나.

 

 

 

 

 

 

 

 

 

 

 

 

 

 

이중섭 ․ 2

 

 

 

서귀포 앞바다까지 떠내려 온

황소울음을

물새들이 수시로 건져내고 있었다.

물고기 등에 올라앉은

발가벗은 아이들

발가락 사이로

물살은 간지럽게 흐르고

은박지 가득

햇살이 뒹굴고 있다.

옆으로 기어가는

게 몇 마리

꽉 짜인 구도

왕성한 식욕으로

파도소릴 까먹는

화가 이중섭.

 

 

 

 

 

 

 

 

 

 

 

 

 

 

 

표적(標的)

 

 

 

그대와 내가

처음 마주치던 눈빛

그 눈빛을 읽고 또 읽으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

분노와 적개심과 투지

스쳐가는 바람과 눈, 비, 햇빛 속에

오감(五感)을 풀어놓고

하나씩 지우고 또 지우고 있습니다.

 

드디어

절대의 순간을 헤집고

티끌만큼의 오차도 없이

달려오는 그대 마음.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의 비어 있는 마음입니다.

 

그대의 빈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싶은 나를

그대여,

용서하시길.

 

 

 

 

 

 

 

백지 ․ 1

 

 

 

가령 내가 사막 한가운데로 유배되었다면

내 무엇을 그리워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채울 수 있으랴.

 

별빛들이 모래알을 비집고 들어서는 밤이 오면

전갈들은 기어 나와 독을 갈며 춤을 추지만

모래바람 씹어도 씹어 봐도

소리라곤 모조리 타버리고 없는 불모지에서,

 

뼈만 남은 한 사내의 꿈을 매장하기엔

아직은

너무 밝은 뜨거움만 넘칠 뿐이다.

 

회오리바람

모래기둥 뿌리째 뽑아들고

아득한 지평선으로 돌진해 가지만,

 

끝내는

하얀 실종을 퍼 올리는

한 자락의 신기루일 뿐.

사막은

죽음보다 넓고 깊은가.

 

 

 

 

 

 

 

 

 

 

 

- 제4시집 -

떠다니는 말뚝 1994

 

 

 

 

 

 

 

 

 

 

 

 

 

 

 

 

 

 

독도 ․ 1

 

 

 

남지라해에서 올라온 난류와

베링해에서 내려온 한류가

만나서 껴안고 뒹구는 그 곳,

푸른 비밀과 건강한 통정(通情)으로

다스려지는 먼 동해 한가운데

사생아처럼 태어나서

홀로 울음을 삼키는 섬.

수천만 년의 세월을

물결 속에 풀어놓으며

외로움을, 씹고 또 씹으면

다디단 꿀맛으로

안개처럼 퍼지느니.

아름다운 절망의 푸른 끝에 서서

독도여, 너의 질기고도 긴 외로움을

오늘에사 비로소 훔쳐보았다.

 

 

 

 

 

 

 

 

 

 

 

독도 정상에서

 

 

 

천지(天地)며 일월성신(日月星辰)은 모두

한 이불 속에 있다.

 

새벽 창호지를 뚫는 남근(男根)처럼

우뚝 솟은 그대 독도여!

 

날이면 날마다 그리움의 흰 정액을

저 광망(光芒)한 바다의 일출 앞에 쏟는구나.

 

태풍도 지진도 온갖 허명(虛名)도

물거품처럼 스러지는 평온 앞에서

 

오, 그대는 이 땅의 유일한 종마(種馬)로 남아 있고

우리는 한결같이 돌대가리로 남아 있구나.

 

 

 

 

 

 

 

 

 

 

섬 하나가

 

 

 

어디서

이름 없는 섬 하나가 태어나는지

혹은 사라지고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 아래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그곳,

섬 하나가 옷을 벗고 있는지

아니면 입고 있는지

이따금 민망한 듯이

안개가 가려주곤 했다.

저 섬에는

어떤 슬픔의 보물이 있을까

혹은 기쁨의 선물이 있을까

끝내 축축해진 시선 끝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소리,

세상 밖으로 오가는 길이

보일 듯 말 듯 한 바다.

 

 

 

 

 

 

 

 

 

 

 

 

 

다도해 ․ 1

 

 

 

섬이 통째로 팔려간다.

묵정밭 한 뙈기보다

더 천대받고 괄시받던 섬이…

푸른 물살의 힘줄로 잡아끌며

억만년을 견디며 버티던

핏줄의 명분도

젖 먹던 힘도 속절없이 빠져버리고,

손 큰 낚시꾼

간이 부은 투망꾼에 걸려들어

몽땅 팔리고 무더기로 전매된다.

섬을 껴안고 핥아주던

파도는 갈팡질팡 각혈만 하고…

물새들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빈 껍데기 섬.

소금기 빠진 햇살은 탈색된 채

조류 속을

하염없이 떠내려간다.

 

 

 

 

 

 

섬이 전하는 말

 -한산도를 지나며

 

 

 

우리들은 다만 섬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결전의 그 날 새벽

장군의 기도에 모두 감응하여

별들도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윽고,

먼 수평선이 튕기면서

화포가 터지고 불화살이 나르고

북소리와 함성이 승리를 확신했다.

그렇다!

장군의 명을 받들어 돌격하던 그 날

우리들은 참으로

눈부신 함대였다.

 

 

 

 

 

 

 

 

 

 

 

 

 

 

 

눈 내리는 날 아침

 

 

 

이제사, 꿈이란 꿈은 깨어

모든 색깔을 벗어 던지고

송이 송이 춤을 추며

그리운 이름을 업고 오는구나.

 

그대 마을로 가는 길은

소중한 이미지로 쌓이고

까치소리 새삼스레

십리 밖에서도 들리느니.

 

시방, 그대 방문 앞에도

눈은 내리는지, 내려서

그리운 이름으로 덮이는 세상

무심히 풍경을 바라보는지.

 

 

 

 

 

 

 

 

 

 

 

 

 

 

 

 

함양에서

 

 

 

자정 넘어

문 밖에서 서성이던 잠이

끝내 나를 불러냈다.

 

지리산을 내려온 엄천강 강물에

젖퉁이 같은 달이 물장구를 치고

물소리는 더욱 낮게 낮게 흘러갔다.

 

고걸 훔쳐보는

내 유혹의 유황불길 위로

왕소금을 뿌리듯 눈밭이 덮쳐왔다.

 

파도소리는 멀리

백리 밖에서 들려오고

욕정의 불빛만 빳빳하게 얼어갔다.

 

밤마다 지리산은

누굴 껴안고 자는지

그것이 정말로 궁금하다.

 

 

 

 

 

 

 

 

 

 

 

노을

 

 

 

아침이나 저녁노을 속에

아주 가끔은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가는 걸 보았다.

눈을 감아도

환히 보이는 길을 따라가서

그대 심장에 꽂히는 화살.

노을은 더욱 붉게 타올랐고

아름다운 비명소리가

가슴 깊이 뜨겁게 인화되어 왔다.

 

 

 

 

 

 

 

 

 

 

젊음만이 바다를 껴안는다

 

 

 

결코 부끄럽지 않는 떳떳함으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는

저 수천수만의 반복 속에

 

어떤 물살로도 지워지지 않은 채

멀리 무자맥질하는

눈부신 섬, 섬, 섬

 

수평선을 입에 물고

하얀 손수건 같은 뭉게구름 속으로

날아오르는 갈매기

바다의 비늘이 뚝 뚝 떨어진다.

 

태양이 녹아내리는 빛살의 바다

수정해버린 모든 괴로움이

물거품의 꽃으로 떠올라

싱싱한 물고기 떼를 풀어놓을 때,

 

나는 보았다.

젊음만이 껴안을 수 있는 바다의

힘차고 튼튼한 그리움을.

 

 

 

 

 

 

 

 

 

 

- 제5시집 -

분명한 약속 1997

 

 

 

 

 

 

 

 

 

 

 

 

 

 

 

 

 

 

비스켓 섬

 

 

 

다도해 섬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스켓.

 

너도 나도

막 집어먹는

달콤한 과자.

 

그러나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어른들이

마구 훔쳐 먹는

달콤한 비스켓.

 

 

 

 

 

 

 

 

 

 

 

 

 

길 ․ 1

 

 

 

길은 하나다

우리가 걸어갈 길은 하나다

우리가 걸어왔고

걸어가야 할 길도 하나다.

 

길은 끝도 없다

길 한 쪽은 하늘로 올라가고

길 한 쪽은 지상으로 내려가서

두 개의 길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우리들은 길의 중간에서

이 쪽 아니면 저 쪽으로 걸어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중간도

수많은 길들로

실타래 같이 얽혀 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길은 사방 어디로나 꿇려 있고

어디로든 통할 수 있다

제 갈 길을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길의 탓이 아니고 바로 내 탓이다.

어느 쪽의 길로 가든지

길의 끝은 분명하진 않지만

희미한 자취를 남기면서

분명히 뻗어 있다.

지상에서 하늘로 혹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폭설

 

 

 

무너져 내린 종소리들이

입 맞추며 비벼대며 춤을 춘다.

 

말을 삼키며 옷을 벗어 던지며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버린다.

달려간다, 달려가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혀를 반쯤 깨물어도

참을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어,

그리움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면

 

만 리 밖에까지 흘러갔던

나의 그리움은 돌아오지만

 

재가 되어 하얀 재가 되어

종소리까지 삼킨 채

 

그대 사는 마을로 달려 가

하염없이 하염없이 폭설로 쌓일 뿐.

 

 

 

 

 

 

 

 

다부동을 지나며

 

 

 

이젠 도화촌의 꽃들은 무참히 지고

연등처럼 달려 있는 능금꽃들만

비에 젖고 또 젖어

처절하게 파편처럼 박혀왔다.

 

작렬하던 포탄도 수류탄도

탄우도 멈췄는데

이미 적도 아군도 흙더미에 묻힌 지 오랜

다부동을 지나며

우리는 잠시 침묵의 포승줄에 묶였다.

 

비명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다부동, 비는 내리고 내려서

40년이 흘러간 격전지

전적비만 부끄럽게 높이 섰구나.

 

핏발 삭힌 능선에

마치 내 형제 내 동포를 만난 양

소나무랑 관목들이 어우러져

등줄기도 따뜻하게

젖고 또 젖는

다부동 골짜기.

 

 

 

 

 

 

 

 

모닥불을 피우며

 

 

 

이 아침,

마른 삭정이들의 관절을 꺾어대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신비롭다 못해 나를 전율케 한다.

삭정이와 삭정이가 만나서

한 몸으로 어우르는 것도

타는 불꽃으로서 가능하듯이

맹목의 사랑으로 찍어 넘긴

생나무 토막들은

죄가 되지 않는 달콤한 비명소리를 내며

불꽃을 튕긴다.

몇 광년의 세월 속으로 뿌리내린

내 잠의 흰 뼈와

그대 잠의 흰 뼈가 만나서

타오르는 불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불꽃은 더욱 신성하다.

 

 

 

 

 

 

 

 

 

 

 

 

 

 

은장도와 눈물

 

 

 

그대가 눈물을 훔친다면

그 누구의 마음도 훔치지 못하랴만

그대 은장도의 푸른 날을 세워서

마음을 썰고 또 썰어 보아라

하얀 눈발로 짓쳐오는 매운 눈빛이

너무도 서럽게 가슴 저미리.

서로가 몸 닿지 않는 마음들은

눈물을 훔칠 일도 없으련만

떠나는 모습 또한 눈물겨워라.

우리가 서럽게 눈물을 키우면서

믿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골라

전 생애를 던지는 폭설로 쏟아지면

은장도 푸른 날의 빛을 따라서

오, 그대 마을로 가는 길이

비로소 환히 트임을 나는 보겠네.

 

 

 

 

 

 

 

 

 

 

 

 

 

 

 

우포늪

 

 

 

우포늪으로 갈 거나

우포늪에 가서

잠자리 나방이 여치 방아깨비를 만나볼 거나

이 지구상에는 하루에도 30종이 멸종된다는데

비 온 후 제 몸이 다 닳도록 현악기를

연주하는 귀뚜라미를 만나볼 거나

왕잠자리 표범나비 메뚜기를 만나볼 거나

달 뜨는 우포늪 짝짓기 하는 여린 곤충들

물 속의 개구리 물자라 소금쟁이 납지리 송사리

자연에 순응해서 짝짓고 새끼치네

변변치 못한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신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거늘

인간의 어리석고 야심에 찬 파괴본능 때문에

드디어 우포늪에도 비상이 걸렸네

아름다운 우포늪이 사라지기 전에

우포늪에 갈 거나 달려가서

나도 한 마리 곤충이 될 거나

하루에도 30종이 멸종한다는 곤충들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세상을 떠날 거나.

 

 

 

 

 

 

 

 

 

 

 

척포 여름포구

 

 

 

마른장마 빌붙은 듯 불볕이 달라붙었다

개미새끼조차 비틀거리는 땡볕 속에

피를 말리는 바람이 혈관 속에서 똬리를 틀고

나무들은 뿌리까지 뜨거워도 달아날 수 없었다

야영장을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듯

숨이 막혀 헐떡이며 척포로 달려갔다

포구에는 어선 몇 척 여유 있게 흔들리며

어창에서 팔뚝만한 생선들을 건져냈다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싱싱한 비린내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춤을 추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되는 사이 더위도 한풀 죽었다

우리가 익사체가 되어 바다를 떠돌아 다녀도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을 무더운 여름

여름 척포포구에서 한 꺼풀의 껍질 벗는다.

 

 

 

 

 

 

 

 

 

 

 

 

 

 

 

 

그대의 눈빛

 

 

 

그대의 눈빛은

내 가슴에

흰 붕대를 감게 하지만

내 잠의 흰 뼈와

내 피의 목청까지 태울지라도

한 번 나고 두 번 죽어도

두 번 나서 두 번 죽어도

나의 전부로도 항거할 수 없는

아름다운 파멸을

그대의 눈빛 아래 심을 뿐이로다

심을 뿐이로다

그대의 눈빛이

내 가슴에

흰 붕대를 감게 하지만

 

 

 

 

 

 

 

 

 

 

 

 

 

 

 

 

벽오동

 

 

 

그대 방문 앞 벽오동나무는

이젠, 몇 번이나 잎을 떨구었는가

 

그 큰 잎새 안에 고이던

그리움의 무게는 참으로 황홀하였다

 

더 큰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잎새를 떨구지만

 

처절한 아픔을

나이테로 새기고 또 새기며

 

하늘 아래 어디선가

우리가 마주 보는 이 시간

 

하늘가에 번지는 그대 휘파람소리

오선지에 걸리는 오동 잎새들

 

오늘도 벽오동은 무심히 자라겠지

자라서 또 다시 잎새를 떨구겠지.

 

 

 

 

 

 

 

 

 

 

분명한 약속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서

무슨 약속을 분명히 할 수 있으랴

천 년 만 년 혹은 몇 광년의 세월을

스트롱을 꽂아놓고 빨아 마실 수 있으랴

빛과 어둠의 중간에서 남몰래

몇 겁의 허물을 벗을 수 있으랴

형체도 없는 얼굴을 그리워한들

성운이 폭발하듯 달려 올 수 있으랴

허허로이 우주공간을 떠돌다

선한 눈동자의 불꽃으로 살아나는

우리들의 분명한 약속을

구태여 발설할 필요 있으랴.

 

 

 

 

 

 

 

 

 

 

 

 

 

 

 

 

 

 

태종대에서

 

 

 

안개가 몰려온다.

태종대 앞바다가

조선 창호지로 둔갑한다.

 

안개를 바라보는

그대의 짙은 눈썹 속에

그리운 길이 숨어 있다.

 

이따금 길고 깊게

가슴을 후비는 무적(霧笛)은

추억의 젖은 이름들을 불러보지만,

 

다시 생각한들, 안개여

그리움은 삶의 뼈다

조선 창호지에 밴 숨소리다.

 

 

 

 

 

 

 

 

 

 

 

 

 

 

 

전주비빔밥

 

 

 

전국의 팔도 인심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한바탕 어울고 뒹굴며

얼싸안고 뭉칠 때

은은한 풍악소리 양념을 치니

빚어내는 맛솜씨는

천하에 으뜸이라

별미로다 별미로다

전주비빔밥.

 

 

 

 

 

 

 

 

 

 

 

 

 

 

 

 

 

 

 

 

 

빙산을 껴안고

 

 

 

빙산을 껴안고

뜨거운 가슴으로 몸부림쳐 봐도

그대는 녹지 않는다

칼바람을 뿌리며 압박해오는

오, 그대 절망의 무게여

그리움의 절정이여.

오랜 기다림의 끝이란

이렇게도 달콤한 것이랴.

백야(白夜)의 만년빙(萬年氷) 속에서

꿈꾸는 사랑의 피에로여.

아득한 설원의 꼭짓점으로부터

쏟아지는 향기로운 극광(極光)에 취해

쓰러지는 나의 최후는

차라리 호사스럽지 않으랴.

 

 

 

 

 

 

 

 

 

 

 

 

 

 

인생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서

때늦게

인생을 헛살았다고 후회하지 말라

잃은 것마저

잊어버리고 나면

비로소 깨달으리니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얻은 것이 더 많은 생애였음을.

 

 

 

 

 

 

 

 

 

 

 

 

 

 

 

 

낙동강 ․ 1

 

 

 

장강(長江)의 쓰러지는 앞 물결을

뒷 물결이 추스르는 따뜻함도

이제는 덧없는 일이다.

 

속절없이 하구언에 갇혀서

통곡 한번 못하고 썩어만 가는

저 눈물의 흰 뼈를 보라.

 

을숙도를 갈아엎는 진흥의 노을 속에

철새들은 떼 지어 높이 날지만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도 않는

저 녹슨 풍경을.

 

개펄 속에 처박힌

주범의 신원은 확인도 되지 않고

영구미제사건(永久未濟事件)처럼 꼬리를 달고

흘러 흘러만 가는 낙동강.

 

강심(江心)은 차라리

말러 버리고 싶다.

 

 

 

 

 

 

 

 

 

 

시인(詩人)

 

 

 

시인을 시를 쓰지만

시는 사람을 만든다.

 

사람이 시를 만드는 게 아니고

시가 사람을 만든다.

 

시인은 사람이지만

시는 결코 사람이 아니다.

 

요즈음은 잘못된 시가

잘못된 사람을 만들고 있으니.

 

시를 쓰는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별이 달아난다

 

 

 

밤하늘의 별들은

도시에선 잘도 질식해 죽는다

달아나지 못한 별들은 죽어 가는데

사람들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누가 별을 죽이는가

누가 별을 잡아먹는가

별들은 도시를 탈출하려고 애를 쓰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려고 기를 쓴다

별을 사랑하면서도

별을 잡아먹는다

그런 인간들이 무서워

오늘밤도 별들은 달아나기 바쁘다

별들은 인간이 무섭기만 하다.

 

 

 

 

 

 

 

 

 

 

 

 

 

 

벼는 익을수록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데

쭉정이 벼라

고개 숙일 리 만무하지만

보라

자화자찬하는 자도 문제지만

그걸 신품종이라고

너스레 떨며

부추기고 꼬드기는

그런 놈도 있으니

가관이다 가관.

 

 

 

 

 

 

 

 

- 제6시집 -

김씨의 허리띠 1999

 

 

 

 

 

 

 

 

 

 

 

 

 

 

 

 

하얀 실종

 

 

 

강가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해질 무렵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시험실의 투명한 후라스꼬 안

백금선을 건너가는 섬광,

충격으로 벌떡 일어서는 사나이가

그림자를 방패삼아

신화 속의 거인처럼 삼지창을 휘둘렀다.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광채,

백금선의 비명소리 풀풀 날리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 무너진 다리 위에서

졸아드는 강물에다 소금을 뿌리며

허장성세로 서있는 너는 누구냐?

누구냐고 묻고 있는 사이

의문은 의문의 긴 꼬리를 끌고

지는 해의 머리칼 속으로 사라진다.

저런! 여기서 나의 하얀 실종을 보다니!

 

 

 

 

 

 

 

 

 

 

 

 

 

김씨의 허리띠

 

 

 

발작을 일으킨 기계와 밤중까지 씨름을 한 수리공 김씨

헛기침을 뱉고 담뱃불을 끄고 기계 앞에 선다.

잘만 타이르면 계집보다 더 고분고분한 것이 기계라

계면활성제를 뿌리는 그의 떨리는 손은 몹시 자애스럽다.

허겁지겁 빨라지는 이송대의 근육질이 번들거리고

거친 숨소리는 안개를 피우면서 어둠을 풀어놓는다.

 

귀를 세운 김씨의 심장이 덩달아 펌프질할 때

막간의 휴식을 잡아챈 망치란 놈 발랑 나자빠지며

목소리도 떨군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든다.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형광등 가에 모여서 수군거릴 때

공복의 만성위염을 앓는 우리의 기능공인 수리공 김씨,

김씨는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맨다.

졸라매지만 허리띠는 안다

김씨가 쓰러지지 않기 위한 제스처임을.

 

그래도 식솔들이 평화롭게 잠든 얼굴 떠올리면서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이는 김씨,

땀방울은 작업등 불빛 속으로 녹아내린다.

그의 고달픈 몸도 나이도 분해되어 나뒹굴까 싶어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조이며 헛기침을 뱉지만

김씨의 허리띠는 불안하다 못해 끊어지고 싶어진다.

 

 

 

 

 

 

 

 

철사를 위하여

 

 

 

구부러진 철사 뭉치가

길바닥에 뒹굴며 붉으락푸르락 한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을 털어 내고

둘둘 감길 때만 하여도

곧게 뻗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미 깨닫고 체념했던 사실이지만

 

쇠붙이가 곧고 단단한 줄만 아는

그 똑똑하고 잘난 놈들 만나기만 하면

분통이 터져 끊어진다, 끊어진

마디마디는 총알이 되고 싶다.

 

가로 세로 걸치면 고기 굽는 석쇠가 되고

또는 짐승이나 죄수를 가두는 철망도 되지만

통로를 차단하는 철조망도 되는 철사를

쓸모가 없어졌다고 함부로 푸대접 말라.

 

단단히 묶어 주는 힘을 선사도 하고

꽉 막힌 구멍을 시원하게 뚫기도 하지만

고무풍선을 찔러도 터지지 않을 만큼

명주실만큼 유연성을 갖고 있는 철사.

 

철사를 구슬려 구부리고 또 구부리면

코끼리나 나무로 비행기로 혹은 물고기로

자유자재로 둔갑하는 재주를 뽐내는

손오공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철사.

 

우리는 아직도 철사의 힘을 모르고

외면하는 신의 얼굴만 찾으려 든다.

 

 

 

 

 

 

 

 

 

 

 

 

 

 

 

 

구두칼도 칼이다

 

 

 

칼을 뽑자, 칼을.

칼은 칼인데 웬 구두칼인가.

플라스틱 구두칼 하나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데

구두칼과 칼은 엄연히 다르다.

 

구두는 나의 체중을 담을 수 있고

나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구두칼을 거부할 수는 없다

구두칼의 검문을 통과해야

긴장을 풀 수 있는 이 자유로움.

 

그렇다, 구두칼은 칼이 아니다.

포근하게 구두에게 몸을 맡기면서

구두칼이 장검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다가도 금방 까먹지만

구두는 구두칼을 품을 때가 일품이지, 암.

 

칼은 승부를 걸 때에 칼을 뽑지만

구두칼은 구두 없이는 뽑을 수가 없다.

그러나, 광을 낸 구두 앞에서는

단검 같은 구두칼을 뽑아야 한다.

 

 

 

 

 

 

 

 

과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우리들의 과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과거를 만나러 간다면

과거는 과연 어디에 모여 있을까.

족쇄 채워진 과거의 자물쇠를 열고

과거를 풀어놓는다면

과거는 다시 싱싱하게 살아나서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화살표의 방향을 돌려놓듯이

시게 바늘을 거꾸로 돌려

깨진 사랑의 이빨을 다시 맞출까

끊어진 고리가 다시 이어지듯

원수와 사랑을 함께 엮을 수 있을까.

사건이 사건으로 조작되지 않고

시든 꽃밭의 향기나 새소리까지

모두 모두 살아나서 만세 부르고 춤출 출까.

우리들의 과거는 어디 모여 있을까

과거를 찾으러 떠나는 사람들과

과거를 찾아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세상, 잉잉거리는 꿀벌들.

달콤한 꿈을 꾸는 보헤미안들이어

타임머신을 전세라도 내어서

가자! 멋진 신세계로.

 

 

 

 

 

 

 

 

소용돌이

 

 

 

내 머리 속에는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천 년의 돌개바람이 지나간 하늘에

뜨거운 자장을 펼친다.

 

때로는 섬광의 갈기를 흔들며

저승의 하늘까지 달려가서

여의봉을 휘두르며

법석을 떤다.

 

내 머리 속의 춤은 언제 끝날지

소리를 죽이며 무리를 지어

군중 속으로 숲 속으로 바다 밑 또는 하늘로

대붕처럼 날아가는 뜨거운 뇌파.

 

소용돌이 속의 내가 흔들린다

가랑잎 같은 세상이 흔들리고

우주 공간이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떠다닌다.

 

누군가가 그물을 끌어당기고 있다.

나는 너의 곁으로 가고 싶다.

목이 맨 메아리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때로는 폭포처럼 블랙홀의 흡인력을 키운다.

 

소용돌이 일으키는 자가발전은

불꽃의 자장으로, 몇 억 광년의 그리운 불꽃으로

긴 소멸의 아름다움을 터뜨린다

불사조 같이

 

 

 

 

 

 

 

 

 

 

 

장미

 

 

 

그대가 무심코 던진 돌팔매가

나의 심장에 박혀 폭발하듯

그렇게 그렇게 장미는 핀다.

 

아아, 선혈이 낭자한

젊은 날의 상처여

황홀한 그리움이여!

 

수천만 촉광의 비수를

가슴에 꽂아 놓고

그렇게 그렇데 장미는 진다.

 

 

 

 

 

 

 

 

 

 

 

 

 

추억, 그리고 급행열차

 

 

 

내 젊음을 담보로 한

추억은

급행열차를 타고 떠났다.

 

한 때 교신이 끊기면서

추적도 불가능해 버린

추억의 급행열차.

 

어느 숲 속을 달리고 있는지

방 속으로, 해저로 달리고 있는지

혹은 어느 하늘나라로 달리고 있는지

 

레이더 스크린에도

종적은 묘연했다.

 

열사의 모래 늪에 빠져 버린

내 젊음의 미이라여.

 

사막에 내리는 눈처럼

소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꾼다

결코 절망하지 말라.

 

보라, 어제 떠난 추억의 급행열차가

오늘 회한을 싣고 올지라도

그리움은 영히 시들지 않는다.

 

 

 

 

 

꿈길

 

 

 

눈썹이 파르르 떤다

떠는 눈썹 끝에 길이 매달린다

길의 눈썹 끝에는 무엇이 매달리는지?

 

그림자로 때로는 바람으로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이 만나서

용서하고 있는 뼈는 아름답다.

 

그림자의 젖은 눈물 속을 가며

서늘한 바람의 가슴 속을 가며

길이 길을 묻는다.

 

길이 길을 묻는다.

젖은 그림자의 눈썹을 달고

서늘한 바람의 눈썹을 달고,

 

허공에 걸리는 뼈가 꿈길을 연다

아름다운 뼈 하나가 꿈길에 젖는다

아, 젖은 눈길, 젖은 눈썹, 젖은 그리움…

 

 

 

 

 

 

 

 

 

 

 

그 숲의 송진내

 

 

 

그 숲에 가면 그리운 송진내 맡을 수 있을까.

솔바람이 일으키는 푸른 파도와 파도 소리

귀만 열어둔 채 눈감고 취하던 그 따스함을

쉰 고개 넘어 갑년을 채우는 사이

나무들은 무럭무럭 내 마음 속 키대로 자랐다.

추억의 냄새, 첫사랑의 아린 환영을 터뜨리며

송진내 팍팍 튀고 있을까. 그 숲에 가면

그 건강하고 빛나던 얼굴 만날 수 있을까

미루나무 우듬지 휘어 감던 까치울음 기쁜 소식

하늘 물살 짓던 산꿩 소리 들을 수 있을까

해거름 차오르던 그리움의 수액 눅진한

고급 향수보다 그리운 냄새, 그 숲의 송진내

그 숲에 가면 그리운 송진내 맡을 수 있을까.

 

 

 

 

 

 

 

 

 

 

 

풍경, 강 그리고 노을

 

 

 

울대를 태우며 노을이 삭는다.

시야를 가리는 개 짖는 소리가

저녁연기를 감아올리며

저무는 하늘에 아련한 흔적을 남긴다.

초경(初經)처럼 묻어나는

추억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강은 다시 한 번 깊은 전율로 떨고 떨었다.

강기슭으로 비듬처럼 쌓이는 시간과

미분양 아파트의 처량한 적막을 지켜보며

이웃마을 불빛들도 손을 비비며 떨고 섰다.

강물 속에 개 짖는 소리도 익사해버리고

좌절의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는

나신의 노을이 푸슬푸슬 삭는다.

 

 

 

 

 

 

 

 

 

 

 

 

 

 

 

 

 

시추선의 꿈

 

 

 

시간과 파도를 잠재우며

바다 속의 거울이 부채질을 한다 설렁설렁

철강 파이프와 시멘트가 얽히고설키며

만수산 드렁칡이 될 만큼 어우러져

수련처럼 뿌리를 내린다.

자고 나면 죽순처럼 돋아나는 구조물을 바라보며

먼 수평선으로 물러난 고래들이 물대포를 쏘고

중동에서 기침만 해도 감기 드는

석유 없는 나라의 몸부림을 상어가 물어뜯는다.

용왕에게 점지 받기 위하여

국력을 쏟아 부으며 제를 올리고

야심에 찬 권력의 강철 주먹을 펴 보인다.

그러나 바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하늘의 부름에 응할 뿐

유령선 한 척 보내지 않는다.

바다 깊숙한 어느 곳에 쌓이는 원죄의 창고

억울한 원혼들이 모여서 단죄를 할 때

바다는 형량에 따라 파고를 높였다 줄였다.

그래, 더욱 죄이렴. 더욱 더 다그쳐

그래 그래 더 쥐어짜야지 아무렴.

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면 그 때

보물 창고의 유전은 슬며시 이동하기 시작한다.

오늘도,

해상의 플랫폼에서는 기름 냄새를 맡겠다고

시추탑을 세우고 구멍을 뚫는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거나 말거나

바늘구멍 안에 낙타가 안간힘 쓰거나 말거나

그래도 시추선의 꿈은 무르익는다.

 

 

 

 

 

 

 

 

 

 

 

 

 

 

 

 

 

 

 

 

 

부두에 서면

 

 

 

시작과 끝의 밧줄이

함께 묶여 있는 부두.

 

잿빛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몰고

갈매기들이 날고 있다

 

국력의 표본인 양 야적된 화물은

싱싱하게 소금기를 머금고 반짝거린다

 

그림자를 포개며

옆구리를 맞댄

연인 같은 선박들

 

깃발을 흔들며

바다에 누웠다 일어서는 뱃고동 소리

 

출항일까

귀향일까

 

시작과 끝의 밧줄이

감기고 풀리는 부두.

 

 

 

 

 

 

 

 

 

어머니

 

 

 

마른장마 중인 밤하늘

그리운 빗소리는 어디에 머무는지

북두칠성 빙그르르 자리를 틀자

무더운 여름밤이 무너진다.

 

하얗게 깔리는 어둠 속으로

걸어오신 여든 셋의 어머니

숨 가쁜 세월을 은하수에 걸쳐두고

사면팔방으로 귀를 열어두신다.

 

바람처럼 달려와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자식들의 발자국 소리에

더욱 잠 못 드는 밤.

 

수족관을 활개 치는 금붕어가

더 귀엽다시던 당신의 쓸쓸함과 사랑

은하수 물길의 물레방아가 되어

언제나 내 가슴을 쿵쿵 울린다.

 

 

 

 

 

 

 

 

 

 

 

고향 달밤

 

 

 

달빛이 흩날린다

꽃가루같이 흩날린다

고향 언덕길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황홀한 슬픔으로 누워 있다.

나이 먹는 것도 까먹은 채

뒷산이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뉘 집 담장을 기웃거린다.

길을 따라가면

길은 어디에나 있고

길은 어디서나 만나서 뒹군다.

우리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도

우리들의 달콤한 운명으로 여기면서

길을 따라 가 본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축복이라도 내리듯

보라, 황금 꽃가루 같은 달빛이

보글보글 된장국 냄새로 끓는다.

 

 

 

 

 

 

 

 

 

 

 

새벽 빗소리

 

 

 

창문을 열어 놓고

빗줄기를 바라본다

 

뽀얗게 물안개를 피우는

유년의 추억들

 

칼금을 긋는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젖어도 젖어도

후련치 못한 생애

 

창문을 열어 놓고

실컷 매를 맞는다.

 

 

 

 

 

 

 

■ 작품해설------------------------------------------------------------------------

 

 

 

염결성(廉潔性)의 시학

 

 

고현철

 

 

 

이상개 시인이 올해로 회갑을 맞는다. 1965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통하여 『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1970년 『영원한 평행』, 1985년 『만남을 위하여』, 1990년『흐르는 마음 하나』, 1994년 『떠다니는 말뚝』, 1997년 『분명한 약속』, 1999년 『김씨의 허리띠』등 꾸준히 시집을 발간한 이상개 시인의 회갑을 맞아,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후배 시인들이 뜻을 모아 시선집을 엮어내기로 하였다. 이 글은 바로 이 시선집으로 살펴보는, 이상개 시인의 시작품을 통한 시인론인 셈이다.

그 동안 발간된 시집에서 골고루 가려진 작품들로 묶여져 있는 시선집을 읽으면서, 필자는 이상개 시인이 자신의 시세계를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줏대 있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상개 시인은, 문학마저도 세태에 떠밀려 빠지게 된 ‘참을 수 없는 유행의 경박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시적 탐색을 줄기차게 해온 그런 시인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이상개 시인은 삶과 문학(시)을 철저하게 일치시키며, 문학(시)를 통하여 삶의 바른 길을 꾸준히 추구하는 시인인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시는 사람을 만든다.

 

 

위에 인용한 시구절에서 이상개 시인의 사관(詩觀)을 잘 알 수가 있다. 그에게 있어 시는, 명백히 인간을 위한 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과 시를 일치시키는 시관은 사실은 우리에게는 전통적이 시관에 해당한다. 시보다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시는 사람이 지녀야 할 바른 태도와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하고, 시를 통하여 독자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시인도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개 시인은 인용한 시의 뒷구절에서 “잘못된 시”는 “잘못된 사람을” 만든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그의 시에서 잘못된 삶의 태도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와 같이, 이상개 시인은 삶의 염결성(廉潔性)에서 흘러나온 염결성의 시를 추구한다. 아니, 시를 통하여 삶의 염결성을 추구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눈빛 고운 이의 이마에

조용히 건너가는 빛살의 파동

 

피가 배인 따스한 웃음의

그대 눈부신 얼굴을 본다.

 

 

인용한 시에 보이는 “눈빛 고운 이”는 이상개 시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되고 싶은 자아 즉, 소망적 자아인 비자기(非自己, anti-self)이다. 이는 “눈부신 얼굴‘로도 형상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고운 눈빛과 눈부신 얼굴은 이상개 시인이 추구하는 염결성의 순수한 자아인 비자기이면서도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의 세계에 대한 형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가을 햇빛의 시‘라는 제목에서부터 시에 대한 이상개 시인의 자의식을 내보이고 있어 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상개 시인에게 있어, 시와 삶은 철저하게 일치시켜야 할 사항이며 또 실제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과 시 사이에 ”조용히 건너가는 빛살의 파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ㅏ동은 말없는 신호로 전하는 내적인 교통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다른 시작품에서는 ”눈웃음의 물결’ (「햇빛에 타는 시」)로 변주되기도 한다. 사람과 시 사이에 내적인 교통이 있어야 비로소 “피가 배이”는 즉, 생명성을 지니는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내적인 교통의 생명성은, 이상개 시인의 다른 시작품에서는 성적인 이미지로 강렬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밤마다 지리산은 / 누굴 껴안고 자는지” (「함양에서」). 이상개 시인이 삶과 시를 일치시키는 전통적인 시관을 보이는 만큼, 그의 시는 전통적인 공감의 시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없이 전하는 내적인 교통이 되려는 시는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어는 “가르쳐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말”(「그 말」)이 되며, 깨달음은 언어를 뛰어 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에 있는 것이 된다. 언어로써 언어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시의 운명이다. 그래서 시어는 “골백번보다는 단 한번으로 넉넉할 그 말” (「그 말」)이 되는 것이다. 시어가 함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삼과 시를 일치시키는 이상개 시인에게 있어, 삶의 길을 탐색해야 하는 시는 “눈먼 길을 밝혀주는” “등불”(「그 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등불인 시는 “최후의 등불”(「그 말」)인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시는 최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그 말” 나아가 시인의 “그 말”이 “사랑(「그 말」)으로 등치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삶과 시를 일치시키는 이상개 시인에게 있어서는 삶에 대한 사랑이 곧 시에 대한 사랑이며 그래서 시가 곧 사랑인 셈이다. 사랑은 전적인 공감의 세계이다. 여기에서도 이상개 시인이 전통적인 공감의 시학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 은장도의 푸른 날을 세워서

마음을 썰고 또 썰어 보아라

…(중략)…

우리가 서럽게 눈물을 키우면서

믿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골라

전 생애를 던지는 폭설로 쏟아지면

은장도 푸른 날의 빛을 따라서

오, 그대 마을로 가는 길이

비로소 환히 트임을 나는 보겠네.

 

 

이상개 시인이 드러내고 있는, 삶과 시를 일치시키는 시관과 공감의 서정시학이 전통적인 만큼 그의 시세계도 전통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시의 제목인 ‘은장도와 눈물’ 자체가 전통적인 소재와 정서인 것이다. 여기에다가 시구절에 보이는 “마음을 썰고 또 써는” 행위 또한 전통적인 인고(忍苦)의 태도를 내보이는 것이 된다. “가장 아름다운 때를 골라” 이루어지는 “폭설”은 그 인고의 결실이기도 하면서, 공감에다 철저히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폭설로 쏟아지면” “그대 마을로 가는 길이” “환히 트”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기도 한다. “그대 사는 마을로 달려 가 / 하염없이 하염없이 폭설로 쌓일 뿐.”(「폭설」).

그대 사는 마을로 달려가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의 감정 때문이다. 그리움은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전통적인 정서가 아닌가. 그리고 하염없이 폭설이 쌓이는 것과 그리움의 정서의 결합은 다름 아닌 전통적인 정경융합(情景融合)에 해당한다. 그만큼 이상개 시인의 시는 전통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상개 시인은 다른 시작품에서 “그리움은 삶의 뼈다.”(「태종대에서」)라고 하여 그리움이 삶의 가장 중요한 기저를 이루고 있는 정서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삶과 일치되는 그의 시에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눈을 감아도

환히 보이는 길을 따라가서

그대 심장에 꽂히는 화살.

노을은 더욱 붉게 타올랐고

아름다운 비명소리가

가슴 깊이 뜨겁게 인화되어 왔다.

 

-「노을」부분

 

 

그 그리움은 위에 인용한 시구절처럼, “눈을 감아도 / 환히 보이는 길”과같이 형상화되기도 한다. 노을이 깔린 저녁은 융합과 사랑의 시간에 해당한다. 아니 이 시에서처럼, 노을은 그리움이 넘쳐 당겨진 화실이 “그대 심장”에 꽂혀 붉게 타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움 비명“이 뜨겁게 인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비명이 아름답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인데, 여기에서 아름다운 비명이란 사랑과 공감에서 비롯하여 “가슴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사랑의 역설은, “그대의 빈 마음속에 / 가득 채우고 싶은 나”(「표적(標的)」)처럼, 비어야 온전히 채울 수 있다는 역설로 표현되기도 한다.

융합과 동화의 세계는 전통미학에서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개 시인이 화가 이중섭을 소재로 하여 융합과 동화의 미적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다. 이상개 시인은 「이중섭(2)」를 통하여,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발가벗은 아이들과 황소, 물새, 물고기, 게 등이 어우러지는 동화(同和, 童話, 童畵)의 세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이중섭이 즐겨 사용한 오브제들이 서로 연관될 뿐만 아니라 서로 어울려 하나의 시적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는 밑용지로 사용한 은박지에 대해서는 “은박지 가득 / 햇살이 뒹굴고 있다”로 포현되어, 이러한 동화적인 시적 세계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상개 시인은 동화적인 시적 세계의 구성에 대해서는 “꽉 짜인 구도”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술적인 완결미로 규정짓고 있다. 그리고 이상개 시인은, 이 시에서 화가 이중섭이 “왕성한 식욕으로 / 파도 소릴 까먹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시(예술) 안과 시 밖이 경계가 없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아가 이상개 시인은 자신을 화가 이중섭과도 동일시함으로써, 이중섭이 그런 것처럼 그의 예술혼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개 시인이 시작(詩作)을 통하여 융합과 동화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여 그의 시에 갈등과 분열의 모습이 표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상개 시인은 실제 현실에 만연해 있는 갈등과 분열의 세태 속에서 부대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더욱 융합과 동화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아는 그의 소망적 자아인 비자기이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열의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모든 만남의 새로움이란 / 노상강도 같은 것”(「언제나 타인」)이라고 느끼고 있는 이상개 시인은, 세상을 제대로 견디기 위하여 도전적인 목소리로 “독종이 되어 / 원수를 더 많이 만들고 씹어먹기”(「신인간론(新人間論)」)라고 전투적인(?)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모질지는 못해 “무엇이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 무엇이 더럽고 독한 것인지” 회의하는 가운데에서도 “정직함을 믿고” 살아가려는 결의를 다진다.(「사라지는 것을 위하여」) 이 결의는 한편으로는 비판정신으로 드러나고 또 한편으로는 반성적 자세로 드러난다.

 

 

자화자찬하는 자도 문제지만

그걸 신품종이라고

너스레 떨며

부추기고 꼬드기는

그런 놈도 있으니

가관이다 가관.

 

-「벼는 익을수록」 부분

 

 

위에 인용한 시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벼를 동일시하고 있는 발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벼는 익을수록 / 고개 숙인다“라는 전통적인 격언을 시작품의 첫머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이 시 화자의 태도는 교훈적이고 반성적인 것이다. 이 시에서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쭉정이 벼“이다. 굳이 그 비유의 의미를 따지자면, 겉멋만 들고 내실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런 성향의 젊은 세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시구절 ”신품종“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오늘날, 컴퓨터를 비롯한 문명의 이기의 급속한 발달은 새것에만 가치를 두는 편향된 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새것 콤플렉스’는 이 시대의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본 기제의 하나가 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품종”이 “쭉정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이상개 시인은 이를 정확하게 꼬집어 내고 있다. 그리고 새것에 대하여 내실을 살펴보지 않고 “신품종이라고 / 너스레 떨며 / 부추기고 꼬드기”는 경박한 유행병적인 태도에 대하여 엄정한 반성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개 시인의 시에 내재되어 있는 비판정신은 이 시대 우리 삶의 여러 측면의 문제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어 다루고 있는 데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전국의 팔도 인심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한바탕 어울고 뒹굴며

얼싸안고 뭉칠 때

은은한 풍악소리 양념을 치니

빚어내는 맛솜씨는

천하의 으뜸이라

 

-「전주비빔밥」 부분

 

 

인용시는 별미로 알려져 있는 전주비빔밥을 통하여, 지역간의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하나의 소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한바탕 어울고 뒹굴며 / 얼싸안고 뭉칠 때”는 비빔밥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지역정서를 넘어선 화합을 의미하는 이중적인 것이다. “빚어내는 맛솜씨”를 “천하의 으뜸”으로 표현하고 있는 만큼, 이상개 시인에게 있어 지역감정의 해소에 대한 열망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변변치 못한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신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거늘

인간의 어리석고 야심찬 파괴본능 때문에

드디어 우포늪에 비상 걸렸네.

 

-「우포늪」 부분

 

 

이 시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우포늪 속의 “미물”과 브레이크 없이 과속 질주하는 물질문명의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 인간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상개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간주함으로써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자연 파괴는 우포늪이라는 오래된 자연을 제대로 보본시키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해 생태계의 순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은 인간도 환경 파괴에 따른 고역을 치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개 시인은 “별을 사랑하면서도 / 별을 잡아먹는”(「별이 달아난다」) 즉, 자연을 찾으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태도를 묘파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시작품을 통하여, 문명을 이루기 위해 자연을 훼손시키면서도 “그리운 냄새, 그 숲의 송진내”(「그 숲의 송진내」)를 찾는 즉, 잊혀진 생명성에 대한 근원적인 갈구를 지닐 수박에 없는 현대인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기도 한다. “황금 꽃가루 같은 달빛이 / 보글보글 된장국 냄새로 끓는다”(「고향 달밤」). 여기에서, 달빛을 황금 꽃가루에 비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역동적인 이미지로서 무엇보다도 생명성을 고양시키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 달빛은 또한 끓어서 퍼지는 된장국 냄새에 비유되어 있기도 하다. 이 또한 역동적 이미지이지만, 앞과는 달리, 시각에서 후각으로 감각의 전이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움을 환기시키는 것이 된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 생명성은 근원적인 갈구인 것이다.

 

길은 하나다.

 

우리가 걸어갈 길은 하나다.

…(중략)…

제 갈 길을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길의 탓이 아니고 바로 내 탓이다.

 

-「길 ․ 1」부분

 

 

이상개 시인이, 삶과 시에서 갈구하고 있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대뜸 “우리가 걸어갈 길은 하나다”라고 언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반성의 자세를 견지하고 잇는 이상개 시인은, 만약에 “갈 길을 찾아가지”못한다면, 이는 다름 아닌 “내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염결성의 시인인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반성과 자기 다짐의 태도를 겹쳐 읽을 수 있다. 자기반성과 다짐의 태도는, 그의 다른 시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변주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창문을 열어 놓고 / 실컷 매를 맞는다”(「새벽 빗소리」)“허장성세로 서있는 너는 누구냐?”(「하얀 실종」). 그런 면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시에서 이상개 시인이 대뜸 “길은 하나다”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기 반성과 자기 다짐 때문이다. ‘한길’의 의미로써 자신이 갈 길을 새삼 다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양 바람만 타는 세상/ 하얀 소멸(消滅)을 건지기 위하여 / 모래라도 십고 살아야겠다.”(「바람 타기」)라는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휩쓸리는 세태 속에서 비록 소멸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가치들을 지키기 위한 결의를 굳게 다지고 있다.

 

 

내, 이제 눈감고도 알겠다.

잘 썩은 괴로움만이

은은한 향기를 피운다는 걸.

 

 

그리고, 삶의 가치와 결실은 고통 속에서야 이룰 수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있다. “썩은 괴로움만이” “향기를 피우”는 것이다. 삶의 보편적 진실은 역설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개 시인이 「김씨의 허리띠」같은 시작품을 통하여, 삶의 구체성을 띠면서 3인칭 객관적 시각에서 실명의 시적 주인공의 부단한 노력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시작품을 통하여, “내일은 쾌청하리라” “쾌지나 칭칭나네”(「쾌지나 칭칭」)라는 절묘한 언어유희를 통해, 서러움과 흥겨움이 결합되어 있는 아이러니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상개 시인은, 철저하게 삶에 바탕을 둔 시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에 해당한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시정신을, 삶과 시를 일치시키는 엄격한 태도에서 나온 염결성의 시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개 시인은 말 그대로 이순(耳順)의 경지에 오른 시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삶이 더욱 깊어져가고 있는 만큼 그의 시가 그 빛을 더욱 깊게 발할 것으로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부산대 교수)

 

 

 

 

 

 

 

 

 

 

 

 

 

 

 

이상개 시인과의 만남

 

- 이상개 시인 회갑에 부치는 시와 산문

 

 

 

 

 

■ 시

임명수 김인환 김성식

성수자 정일근 최원준

 

 

■ 산문

정진채 오하룡 손팔주

유자효 정영태 서규정

차달숙 김상균 강경주

박홍배 최영철 김형술

강동수 배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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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

-松濟에게

 

 

임명수(시인)

 

 

길들지 못한 길이 가까이 있네

모난 돌자갈처럼 서걱이고 있네

 

이 길은 내 집에 닿는 길이지만

종일 허둥대며 쫓기듯 바삐 왔네

 

천천히 천천히 가라고

고요히 고요히 흘러가라고

 

풀잎 흔드는 바람 한 점에도

언덕 위 돌부처 무심히 웃고 있네.

 

 

 

 

 

 

 

 

 

 

 

 

 

 

 

 

 

우리나라 좋은나라

-이상개 시인의 갑년을 축하하며

 

 

김인환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물에 씻은 쌀밥을

다시 물에 말아먹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당대에 재벌이 나오는 자랑스런 나라

재벌이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는 나라

대통령이 수천억 원씩 감춰 두고 쓰는 나라

아버지는 청와대 아들은 교도소에 가는 나라

고리채업자도 명찰만 바꿔 달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나라

거짓말도 잘하면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돈이면 감투도 사고 돈이면 명예도

살 수 있는 나라

작은 도둑은 감옥에 가야하고

큰 도둑은 활개치고 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 좋은 나라는

이상개 시인이 사는 좋은 나라

이상개 시인의 부인 목서분여사가 사는 좋은 나라

시원이와 빛남이가 꽃송이로 자라는 좋은 나라

 

이상개 시인은 좋은 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갑년까지 살고도 젊기만 하다

이상개 시인과

이상개 시인의 부인 목여사와

이상개 시인의 두 딸이 사는 좋은 나라

이 행복한 사람들을 지켜보며 사는

우리들도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은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내

-시인 이상개

 

 

김성식

 

 

간밤

무던히도 덥던 중앙동 네거리에

내걸린 섭씨 38도 5분의 무더위가

별빛에 쫓기어

서서히 줄어들 즈음

남포동 광복동 주점을 돌아다니며

고래가 바닷물 퍼 마시듯

시를 마시던 이상개는

하늘에 걸려 있는 작은 집을 찾아

흐트러진 몸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

적어도 지상의 인간이었지

온갖 오물, 쓰레기와 욕지거리 속을

빠져나와

구름 위로 오를 때까지는

 

지상 6층의 빌딩 위에

루핑과 판자 드럼통 등으로

모자이크 된 비둘기 집 같은 거처에

이제 함께 늙어가는

아내의 바랜 숨소리만이

개숫물이 미처 빠지지 못한

싱크대 속으로 잦아들지만

어느 틈엔가 시인은 천상의 인간이 되어

원고지를 꺼내 시를 쓰고

 

-나 떨어지리니

하늘에서 떨어지리니

신 새벽의 얇은 어둠을 찢어 내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땅 위의 모든 것들을 만지러

떨어지리니-

 

새벽마다 지상의 인간이 되기 위해

중앙동 네거리로 몰려드는

바다 안개를 헤치면서

층계를 내려서는 그의 가슴엔

하늘에서 쓴 시 한 편이

매달려 있었지

매일 아침, 허름하게 매달려 있었어.

 

 

 

 

 

 

 

 

 

 

 

 

 

 

 

 

 

 

 

나무 한 그루

 

 

성수자

 

 

욕심의 그늘도 비껴선

늘 제 둘레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바쁠 것 없이 거느린

시간 데불고

늘 유유자적

환하십니다

세상에 손 잡을 일 너무 많아

책 엮어 건너는 길

오로지 트여진 한길

걷는 길에

꽃등 켠 봄빛 가득합니다.

 

 

 

 

 

 

 

 

 

 

 

 

 

 

 

 

 

중앙동

-이상개 시인께

 

 

정일근

 

 

이제 중앙동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땀 흘리며 먹던 중앙대구탕의 더운 점심과

무적이 올 때마다 바다로 등이 굽던 젊은 날의 쓸쓸함

빗물이 번지는 삼류극장의 낡은 흑백영화처럼

화면은 자꾸 끊어지고 줄거리는 달아나 버렸지만

여전히 붉고 선명한 그 사랑 봅니다

더나오면 두고 온 마음마음 눈부처가 돋아나는 것일까요

늘 망설여지던 어지러운 골목길의 선택

중앙동 저녁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끊임없이 솟아나던 적의의 모난 각도

화해의 손을 내밀며 둥글게 풀어질 때

스쳐온 길 위의 술집마다 켜지는 따뜻한 등불

마음 쓰린 날 술국처럼 좋은 사람들 거기 있나요

호명하지 않아도 중앙동 두 눈 가득 추억처럼 차오르고

무시로 발 아래 찾아와 나를 부르던 길

부산우체국 신호등 건너 현대양과 골목길 꺾어

도서출판 빛남으로 가는 길

이제 중앙동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李祥介와 이번개

 

 

최원준

 

 

선생님 성함은 특이하여 한자로 읽을라치면

어떤 이는 이양개, 도 어떤 이는 이양분으로 읽는다는데

선생님은 그래도 허허 그러려니 하신다

언젠가 수취인이 이상개가 아닌

이번개로 적힌 우편물을 받고 나서의

선생님 말씀이 또 걸작이시다

뚱개, 물개, 무지개, 솔개 등등 개도 많은데

그 중에서 제일 근사한 걸로 골라주어

한번쯤은 써 봄직 하시다는 것이다

선생님 시 중에 「추억만들기4」에 보면

이상개면 어떻고 이번개면 어떠랴

그래그래 그대로 두자 그 곳 만이라도

이번개로 부르게 두자

가끔씩은 이번개로 통하기로 하자」

라며 실수에 대한 너그러움과

알고 난 후 그들의 무안함을 미연에 묻어두신다

선생님의 그 넉넉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당신 어르신께서 귀히 여겨 지어주신 함자를

이렇게들 불경스럽게 쉽게 바꿔 부르는 세상에

선생님은 그러려니 하신다

명확한 선을 긋고, 같은 잣대를 편을 가르는

이 시대에, 홀로 초월한 느낌

그래서 선생님은 궁극에는 우유부단파가 아니다

사람을 속내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만 손해 보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손해 본다면 그 자체조차 자유로우신,

부산 문단의 대표적 유유자적파이시다

그러나 그런 선생님을 우습게 알면 큰 코 다친다

선생님 시집 『분명한 약속』의 서문,

「詩여 毒針이 되라!」란 글을 읽었다면,

그리고 시 전편에 흐르는 불의에 대한

매서운 질타의 소리를 들었다면,

우유부단은 무슨!

박으로는 부드럽고 인자한 분이시지만

불합리에 대한 대처원칙은 확고하신 분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는 항상 한발짝

양보의 미덕을 아시는 진정한 우유부단파

그 분이 이상개 선생님이시다

이번개로 불러도 허허 하고 소탈하게 웃으시는 그분

우리 우유부단파의 대장.

 

 

 

 

 

 

 

 

 

 

 

 

 

 

 

 

 

 

이상개 시인과 문학이야기

 

 

정진채(동화작가)

 

 

내가 이상개 시인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의 초반이었다.

모습이 어질고 미소를 지을 때 생기는 불우물이 인상적인 젊은 선비였다.

처음에는 가끔 문학행사 때나 얼핏 만나는 게 고작이었지만 차츰 얼굴을 익히면서 술자리에도 마주 앉는 때가 자주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소박하고 정갈했다.

그가 <빛남>을 열 무렵 나는 문인협회의 부회장으로 그는 상임이사로 임하면서 아주 절친한 사이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89년 9월, 처음으로 그가 경영하는 <빛남>에서 『80년대의 한국동화문학』이라는 제호의 아동문학 평론집을 내게 되었고, 이어 1992년에는 『누구나 동화를 쓸 수 있다』라는 제호의 이론서를 내었다.

그 무렵 동화책이 학교를 통해 잘 팔려서 그와 나는 1993년 『눈썹만 보이는 할배』라는 제호의 동화책을 부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만 부를 발행하게 되었다. 발간 초기에는 주문도 쇄도했고 학교 쪽으로도 다소 배본이 되어 우리는 한 건 했다는 쾌재를 부르는 참이었는데 도무지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학교엔 바깥에서 종이쪽지 한 장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엄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출판사에 쌓인 책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고 팔 길은 막히고 그러다 보니 이쇄계약이라 이 시인이 경영하는 출판사의 돈 줄이 또 막혀서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점잖은 체면에 입맛만 다시고 있는 이 시인을 당시의 남천동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그 책들을 내가 인수하게 되었다. 지금에사 말이지만 『눈썹만 보이는 할배』의 원고는 서울의 유명한 출판사들이 군침을 흘리던 신판 본격 귀신이야기인데 자연애를 주제로 다룬 흥미물이었다. 솔직히 고백을 하면 아직도 나는 그 책들을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후 2000년 4월에 이론서 『아동 독서지도법』을 빛남출판사에서 또 내었다. 이 책에 대한 판매실적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이 시인과 나는 아동독서 지도자로서 이론보다 시무에 중점을 둔 이 이론서가 한번쯤 빛을 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상개 시인과 연관된 이야기 가운데 참으로 잊지 못할 일 한 가지만 말 하라면 아무래도 다음 이야기가 되겠다.

아마 1994년으로 기억된다. 이상개 시인이 부산시인협회 회장으로 당선되던 해 2월이었다.

그의 선거일을 돕는다고 낮부터 국제신문 주변의 술집에서 시인들을 만나면서 청탁을 불문하고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는데 국제신문 강당에서 선거를 치른 다음부터는 이미 필름이 끊겨버린 상태였다.

식당에서도 밥은 안 먹고 술만 찾으니까 딱했든지 정비동 시인이 다음 여흥 자리로 먼저 가 있으라고 술 한 잔도 안 먹은 김동재 시인을 딸려주어서 국제신문 사옥 쪽으로 흔들흔들 김동재 시인과 함께 걸어간 때였다.

갑자기 걷고 있는 인도 쪽으로 차가 덮쳐버린 것이었다. 취중에 몸이 부웅 뜨면서 인도에 나가 떨어졌는데 그만 정신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인근의 중소에 근무하는 20대의 젊은이가 손님이 세워놓은 차를 면허도 없으면서 호기심으로 끌고 나왔다가 뒤쪽에서 영업용 택시가 속력을 내면서 달려오자 당황한 나머지 인도 쪽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귓결에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발자국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내 옆에 김동재 시인이 머리 쪽에서부터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미 피가 1미터도 훨씬 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취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울부짖으며 김동재 시인을 깨워 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온 백 식, 동길산, 서규정 시인들과 그 밖의 여러 시인들이 달려들어 김동재 시인을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나에게 괜찮으냐고 의사와 함께 질문을 했지만 그냥 어안이 벙벙하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김동재 시인의 회복만을 간절히 빌었다. 결국 김동재 시인은 그날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의 건강과 행운을 손 모아 기원한다.

나는 그 날의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어혈이 들어 몇 달 동안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남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까운 문우들은 그 상황에서 어찌 무사할 수 있었냐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조상이 도우고 하늘이 도왔다고들 하지만 사실 나를 살린 것은 바로 술 그것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날 밤 내가 입었던 바바리코트는 겨드랑이와 어깨부분이 갈가리 찢어졌고 양복 웃저고리도 겨드랑이 부분이 터져 있었다. 한 참이나 뒤에 안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술, 술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차의 충격으로 그대로 부웅 떴다가 땅에 떨어져 흔들흔들 정신을 잠시 동안 잊었던 것이었다.

이상개 시인의 선거 뒤풀이는 그렇게 막을 내려서 보늬 아니게 먼 훗날에까지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남게 된 것이다. 다시 그 2월을 보내며 남은 세월 우리 문인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에 다지고 있다.

 

 

 

 

 

 

 

 

 

 

 

 

 

 

 

 

 

 

 

 

 

 

문학 30년의 인연

 

 

오하룡

 

 

이상개형의 회갑기념 문집이 값져 보인다. 예사문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문인들의 따뜻한 인정이 이 문집을 만들었다. 내 일 이상으로 반갑고 기쁘다. 『떠다니는 말뚝』이후 그와의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의 진짜 이야기는 이 원고의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다. 그래서 재탕이라는 가책을 느끼면서도 감히 그대로 게재를 의뢰한다.

 

그러고 보니 이상개 시인과의 문화적 인연도 30년을 넘어선 것 같다. 군대를 제대하고 <잉여촌 동인회>를 결성하여 창간호를 낸 해가 1964년이었으므로 그렇게 된다.

그에 앞서 그와 나는 해병대에 같이 입대한 동기로써, 그리고 당시 해병대사령부가 기관지로 발행하던 『해병』지에 陣中詩를 투고하면서 지면으로 작품과 이름으로 혹은 직접 만나던 인연까지 포함하면 인연의 고리는 훨씬 앞당겨진다.

뿐만 아니다. 실상 그와 나는 내가 한 살 앞서기는 했지만 같은 면(창원군 상남면)에서 동시대에 성장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때는 만나지 못했다. 성년으로 들어서던 초입의 어는 날 밤 잠시 인사만 나누고 하룻밤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그때 만취 상태가 되어 있었고 나와 친하던 김영주라는 친구가 그를 데리고 왔었다. 그때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막 한 그런 시기가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날씨가 제법 추울 때였다는 기억이 난다.

나는 그 고장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고등공민학교란 데를 1년여 다니다가 공부를 더 하겠다고 부산의 어떤 고아원으로 들어가면서 주경야독하는 떠돌이 길에 들어섰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거기 남아계셨으므로 자주 상남(상남면 소재지)에 들렸었다. 어머님은 나를 위해 의붓아버지를 졸라 2칸자리 오두막집을 하나 지었는데 내가 마침 그 집에 있을 때 김영주가 이상개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김영주는 10여년전 한국마사회에 근무중 제주도 출장중에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나는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원고지를 기고 다니곤 했으나 이 시인이 고교시절에 벌써 문학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열혈 문학 지망생이라는 것을 알리도 없었고 그냥 처음 만남의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을 리도 없었다. 아침에 우리는 평범하게 덤덤히 헤어졌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그랬는데 그해 1960년 10월 해병대에 입대하는 날 신병훈련소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로 이름은 기억하고 있 참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그와 소속이 다른 상태에서 3개월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포항의 1사단 수송대대에 배치 받았을 때 그는 인근 11연대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막 도착한 『해병』지를 보니 이상개의 「白波에 부치는 戀歌」란 제목의 제법 긴 작품이 실려 있는데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수준이어서 이때부터 나는 이 시인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되었다.

 

 

네 조용한 얼굴

그 맑은 동공에 맺힌 단 한 방울

눈물이

이토록 가슴을 넘쳐 끓듯이

어쩌면 바다는 묵은 諦念의 미련으로

내가 애써 기억해 논 이름마저

지워버리는가

 

이렇게 첫 장을 열고

 

출렁이는 네 치맛자락이나

일렁대는 내 가슴이나

모두가 바다를 그리워 해풍에 나부끼는데

울부짖으며 내 뿜은 저 환호야말로

못난 거리의 살벌한 騒音보다야 낫지 않는가

(이하생략)

 

 

이렇게 이어지던 이 작품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역량과 감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결정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구나 그를 바다를 보면서 이처럼 간절하고 애끓는 연시를 빚을 줄 아는 재능을 지녔구나. 나는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였다. 당시 『해병』지에는 공중인 시인과 또 누군가가 투고 작품의 선을 맡았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대단한 찬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밖에도 그의 작품은 투고될 때마다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자들의 좋은 반응이 있었다. 나는 몇 편 투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겨우 1편인가 발표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군더더기가 많다거나 더 갈고 닦아야 하겠다는 질책성 언급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를 글을 잘 쓰는 시인으로서의 흠모의 감정으로 만났으나 그는 나의 시보다는 같이 문학에 듯을 두고 있는 동향이라는 동류의식에서 만나주지 않았을가 짐작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인연으로 하여 그와 나는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같은 부대에 있던 조남훈 시인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 이럴 게 아니라 제대 후에도 이런 우리의 우의를 지속시켜 문학 동인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데까지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잉여촌동인회는 이렇게 태동되어 제대하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잉여촌』창간호를 내게 된 것이다. 제대 후 그는 1년 코스의 직업훈련원에 입교하여 기술자의 길로 접어들어 진해의 해군문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부산의 대한화섬이라는 회사로 전직하여 한 직장인으로 자리를 잡으며 부지런히 글을 섰다. 그런 글들은 『잉여촌』에서 진한 빛깔의 생명력을 드러내며 책의 무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빈약한 규모에 형편없는 인쇄 상태였으나 나올 때마다 약간의 반응이 있어준 것은 그의 작품 덕분이 아닌가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동인지 창간 이듬해인 1965년 예상했던대로 그는 시전문지 『시문학』에 투고된 작품이 김현승시인에 의해 한꺼번에 2회 추천되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다. 그때는 대부분의 문예지들이 2~3회 추천제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시문학은 3회를 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1번만 더 받으면 완료추천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다음 추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알기에는 시문학이 없어졌거나 다시 재창간되었거나 전혀 개의함이 없이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보아 추천의 속성 혹은 무의미를 절감해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추천 후 5년이 지난 시저에서 이시인은 첫시집 『영원한 평행』을 묶음으로써 추천의 찜찜한 앙금을 깨끗이 지웠다.

나는 제대 후 한동안 중학 은사 집에서 그의 어린 자녀들의 학습을 돌보다가 그가 다니던 모 종묘회사의 필경사(고객 카드의 정리와 고객들에게 보내는 카다록 혹은 기관지를 보내는 봉투에 주소 쓰는 일)로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 회사의 기관지 만드는 곳에 급사 같은 일에서 시작하여 편집가지 맡아하며 오직 생존만을 위해 급급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내일을 조금치도 의식치 않고 순간만을 의식하는 단세포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품을 남보다 잘 쓰겠다거나 그런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다.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니 일과가 끝나면 술만 마셨다. 자신의 작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이런 미망에 빠져 있었던 그때의 나를 뒤돌아보면 지금도 그 시절을 칼로 도려내고 싶도록 회한의 참담함뿐이다. 그런대로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은 이 시인이 이끄는 대로 되지 않는 글을 쓰면서도 『잉여촌』에 끌려왔기 때문으로 여기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재주나 능력은 고사하고 문학적인 치열함 혹은 패기조차 갖추지 못한 억지 문인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함이 옳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에 열심히 편지 교환이 있었다. 차츰 내 망막에 그가 내 구원에 표상같이 인식되었는지 모른다. 문학에 애착이 가면 갈수록 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우정은 각별해졌다. 그를 만나러 훌쩍 부산에 내려가 그가 자취하고 있던 반여동의 황망한 거리를 몇 차롄가 헤맸던 기억이 있을 정도다.

그와 나 사이가 더 밀접해진 것은 그가 어렵게 한 결혼에 실패하고 직장을 서울의 대한교련 산하 과학교구공사로 옮기면서였다.

그가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매주 만났다. 그는 토요일 저녁 아니면 일요일엔 거의 내 집으로 왔고 그러면 우리는 하루 종일 붙어 뒹굴었다. 문학 행사같은 것이 있으면 붙어 다닌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이미 기성문인으로 알음이 많아서 그의 소개로 인사한 문인도 꽤 있었고, 그도 내가 잡지를 하며 익힌 문인들과 격의 없이 만나는 사이가 된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내가 뒤늦게 처녀시집 『母鄕』을 펴내며 등단을 결행한 것도 그의 격려의 덕분이었다. 나태에다 소심증에다 염세적인 퇴폐의식에다 패배의식 같은 열등의식까지 두루 갖춘 내 입장에 그때 그렇게라도 용기를 내어 서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이처럼 문단 말석이나 자리하게 되었을 리가 없다.

그때 만나던 문인들은 요즘도 만나면 이시인 안부를 묻고 이시인도 그들을 만나면 내 안부를 묻는 것만 보아도 당시에 우리 둘이 얼마나 붙어 다녔는지 알 수 있다.

그때의 삽화거리 하나를 소개하면, 소설가 김용운과 우리 둘이 술이 거나하게 되어 그의 집으로 밤늦게 갔을 때의 일이다.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웠다. 김용운의 집은 신촌 어디쯤의 오르막길을 지나야 있었는데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던 이 시인이 그만 앞으로 넘어지며 얼굴을 얼음판에 갈았다. 괘 상처가 크게 났었다. 밤늦게 술꾼들이 들이 닥쳤으니 김용운 부인의 놀람이 컸었다. 우리들은 술을 좀 얻어 마셨는지 어쨌는지 서둘러 우리 집으로 같이 귀가했는데 그날 저녁 이 시인은 쾌 쓰라림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 약이 효험을 보여 그 상처가 흉터 없이 잘 나았다. 그날 저녁 그보다 술이 덜 취했던 내가 피를 흘리는 그를 붙들고 안절부절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를 통해 현대시협에도 가입하였고 그와 더불어 춘천에서 있었던 현대시험 세미나에도 참석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도 어지간히 붙어 다녔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낙향하자 약속이나 한 듯이 그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서울생활이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산에 내려와서 그는 후배의 점포에서 일을 봐주다가 후배의 배신에 말려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 오늘 <도서출판 빛남>의 모체가 된 <현대문화사>의 창립이다. 초기의 분위기는 다음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아침이면 밀물처럼 밀려와서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후

쥐새끼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中央洞 한 귀퉁이

그래도 뭘 먹고 살 것이 있으리라고

웅크리고 앉았는지

 

-시집 『만남을 위하여』중앙동 중에서

 

 

흐르는 마음 하나

붙잡기 위하여

……

나도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싶은 마음으로

 

-시집 『흐르는 마음 하나』중에서

 

 

어떻든 그는 부산에서 자리 잡으면서 재혼을 하게 되는데 진해 규수이던 미모의 목서분씨와의 백년가약에도 내가 매파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연이 있었다. 목부인과의 결혼이 전기가 되어 그는 비로소 안정을 찾으면서 현대문화사를 열심히 키워나가는 한편 출판사를 여러 이 출판사가 출판계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부산 출판계의 체면을 일신시키면서 전국적인 유명출판사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업적은 지난해 부산의 유명한 봉생문화상을 수상한 것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홍안의 청년 때 만나서 그나 나나 배갈이 성성한 연치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정말 미청년이었다. 그를 처음 만날 때 나는 여드름투성이의 내 몰골과 비교되어 정말 곱다는 인상을 받았다. 티 없이 맑은 피부에 사슴 같은 선량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이시인도 늙은 것인가 하고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도 지금 백발이 성성한데다 앞머리가 빠져 반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

힘이 달려 18집에서 종간을 고하고 말았지만 『잉여촌』의 업적은 그가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으며 지금 나름대로 탄탄한 문단활동을 하고 있는 동인들의 대다수도 그가 영입했던 좋은 분들이었다.

누구보다 바쁘게 살면서도 시에 치열하였던 그는 두 번째 시집 『만남을 위하여』에서 이기형 시인이 서문에서 지적하였다시피, 그는 생기기는 여성적으로 곱게 생겼지만 그의 시가 펼치는 내면세계는 고뇌와 격정이 찬 남성의 그것이라고 한 그대로이다.

그런 기질이 있기 때문에 문학에 있어서도 누구 못잖은 견고함과 착실함을 지켜나가면서 <도서출판 빛남>까지도 탄탄하게 키워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네 번째 시집을 낸다며 발문을 쓰라기에 그와의 30년 우정을 두서없이 나열하는 치기를 보이는 것은, 그의 작품에 이해에 조금치나마 도움이 될까하는 내 나름대로의 우매하기만한 노파심에서다. 그의 시집에 오히려 누가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오, 그대는 이당의 유일한 種馬로 남아있고

우리는 한결같이 돌대가리로 남아 있구나

 

-『독도 정상에서』중에서

 

 

바쁜 가운데 상재한 그의 네 번째 시집이 ‘떠다니는 말뚝’이 아니라 그가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독도처럼 우리 문학의 한복판에 의연히 솟아 있기를 바란다.

 

회갑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처녀시집 발문----------------------------------

 

永遠한 平行

 

 

손팔주

 

 

李祥介 兄은 筆者와 같은 昌原産으로 馬山中學과 馬山高等學校의 동기동창일 뿐 아니라 고3 때 1년간 책상을 함께한 짝지였다. 우리는 理科班인 4반에 배치되었는데, 李兄은 진학 준비에는 관심이 없고 文學서적을 탐독하고 시작에 몰두하여 당시 <학도주보>나 『학원』에 습작이 발표되곤 하여 일찍이 文才를 보였다. 필자도 이과에 비치되어 있었으나, 이는 아버지와 2학년 때 담임한 외숙의 뜻일 뿐 나는 文科에 진학하여 의사나 약사보다 자유스러운 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물리나 화학시간에는 『현대문학』을 비롯해서 이훈경 선생님이 권장하신 세익스피어의 사대 비극을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고3들은 흥미 없는 수업시간에는 엎드려 잔다고 하니 그것보다는 나았다고 자부한다.

나는 이과에서 文科로 진학하려니 시험과목이 맞지 않아 동국대학교 국문과로 진학하고 이형은 바로 입대하여 제대하더니 취업을 위해 공업기술학교에 진학하였다.

내가 대학 3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李兄은 해병대를 제대한 직후 詩友會를 조직하고 동인시 시집 『잉여촌』을 발간하였는데, 책이 나올 때마다 우송해 주었다. 李兄의 시만 노트에 옮겨 내 것인 양 공덕동에 사시던 未堂 서정주 선생 댁을 찾아가 강평과 지도를 받고 李兄에게 回信을 보내곤 하였으니, 未堂 선생께 간접 지도를 받은 셈이다.

군에서 제대한 李兄은 진해 해군 공작창에 근무하다 부산의 대한화섬에 취업을 하였고, 나도 대학원을 마치고 곧장 부산여자대학으로 부임하게 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다.

1970년 가을 李兄은 그간 창작한 작품 74편을 시집으로 간행하겠다고 의논해 왔다. 당시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고 있어 학보를 인쇄하던 亞成出版社에서 간행하기로 하고, 서문은 김현승 교수께 부탁드리고, 발문은 내가 쓰기로 하였다. 시집은 3부로 나누었는데 제2부 『永遠한 平行』을 시집 이름으로 정하였다.

책이 간행되자 팔아야만 인쇄비를 감당하겠기에 국문과 학생들과 동래여고의 최한재 선배께 부탁해서 200권쯤 보급했다고 기억한다.

첫 시집을 간행하였으니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는 그냥 넘길 수가 없어 출판 기념회를 갖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30년전 부산은 文化人들이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찻집이 아니면 <신신예식장>등이 출판기념회 장소였다. 서면 ○○다방을 빌려 날짜와 시간을 예약하고, 축사는 <한글문학회> 안장현 선배님이 맡기로 하고, 부산여대 음악학과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에게 축가를 부탁하고, 또 제자들 중에 시 낭송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골라 약속을 하고 초청장을 인쇄에 맡겼다. 사회는 筆者가 맡고 시집 강평도 발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키로 하였다.

李兄의 출판 기념회는 친 ․ 인척과 내빈, 마고 동기, 부산여대 국문과 학생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기억된다.

그 뒤로 가덕도나 松亭 등지로 낚시를 같이 다니기도 하여 자주 만나곤 하였으나, <대한화섬>을 그만 두고 서울로 간 뒤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李兄이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되어 처음에는 동판 제작사를 운영하다가 출판사를 열게 된 후로는 나와 거래가 있었다.

내가 역주한 문집과 논문집 재판을 빛남출판사에서 간행하게 되었고 그 뒤 북경대학 朴忠祿 교수가 역주한 『滄江詩文選』도 내가 교정하여 일부를 보급하는 일을 책임지기로 하고 간행해 주었고, 그 뒤로 제자들의 시집이나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려 할 때 내가 소개하여 간행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맡아 李兄은 시단은 일을 주도하는 한편, 계간 『문학지평』을 발행하기도 했다. 나는 古典을 전공하게 되어 창작하는 文友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文學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부산이라는 지역과 중․고 동기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李兄은 내 머리 속에 항상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열 안 되는 친구 중의 한사람이다.

내 나이 먹는 줄은 모르고 벌써 회갑이라니 40여 년 동안의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간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문학 서적이라면 팔리던 안 팔리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마구 간행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고 가족을 생각해서 손해 볼 사업은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마음만 답답하다.

이제 철이 더는 나이가 되었으니 삶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도 생각하고 항상 건강하고 「爲人駐顔光」하길 바랄뿐이다.

 

 

 

 

 

 

 

 

 

 

 

 

 

 

 

 

 

 

 

 

 

 

 

 

 

 

 

상개 형의 한 추억

 

 

유자효

 

 

이상개 형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재학 때로 기억된다. 고교 동창 정대현과 함께 부산에서 만났으니 방학 때 쯤이 아니었을까?

장소는 고교 은사 안장현 시인 댁 쯤으로 회상된다.

상개 형은 당시 이미 중앙 문단에 데뷔한 기성 시인이었다. 그리고 총각이었다. 부산에서 큰 직장을 다니고 있는 건실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상개 형은 미남이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상개 형은 정대현과 나에게 동인 가입을 권유했다. 『잉여촌』이라는 이름의 동인지를 내고 있는데 가입하라는 애기였다.

당시 정대현과 나는 건달이었다. 나는 신아일보라는 신문의 신춘문예에 시부 입선을 했으나 문학적인 행보가 잘 풀리지 않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잉여촌>동인이 된 덕으로 나는 서울에서 오하룡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하룡 형은 <흥농종묘>의 편집 일을 보고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었다.

정대현이 서울에 오면 나는 하룡 형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 댁을 찾았다. 정대현과 나는 하룡 형의 댁을 ‘영양센터’라고 명명했다. 우리의 영양 상태를 호전시켜 주는 곳이란 뜻이었다. 부인은 배고픈 마라푼다들에게 맛난 음식을 베풀어준 보살이었다.

울산에서는 조남훈 형을 만났다. 한양 화학에 근무하고 있던 남훈 형도 참으로 따스한 선배였다.

그리고 한참 뒤, 김성춘 형이 <잉여촌>에 가세했다. 깔끔한 용모의 신사였다. 『잉여촌』에 실린 시를 보며 “아, 참 잘 쓰는구나!”하고 감탄했는데 『심상』이 창간하면서 첫 추천 시인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는 것이었다. 「바하를 들으며」라는 시제는 아직도 나에게 꿈결 같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런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상개 형의 덕이다. 그 중심에 언제나 형이 있었다.

상개 형이 부산의 직장을 왜 그만 두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그 뒤 형의 생활은 상당 기간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지 않은 서울 탐색을 청산하고 마침내 형은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이 형에겐 맞지 않았으리라.

상개 형을 안지도 어언 30년이다. 이 긴 세월 동안 내가 형에게서 발견하는 최대의 미덕은 변하지 않는 마음 즉, 恒心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형의 차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인지... 경탄과 함께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형이 시를 끊임없이 천착해 올 수 있었던 힘의 원천도 바로 이 恒心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나는 형의 끊임없는 시업을 보고 놀란다. 형은 시에서 결코 제스추어를 쓰지 않는다. 가식으로 구미지 않는다. 형의 인품처럼 겸손하고 맑다. 그러나 그 울림은 깊어서 더없이 그윽하다.

상개 형을 만났다는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상개 형과 만나며 살아온 지난 30녀는 나에게 복된 시간이었다. 형의 인품과 형의 시는 나에게 한없는 위안이 됐으며, 때로 방황하는 나의 넋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 손길이 되기도 했다.

지난 해 가을, 부산 출장길에 중앙동에서 형을 만났다. 중앙동은 내 유년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형과 함께 40계단도 가보고, 내가 살던 집도 보았다. 형과 함께 고향길을 거닐고 한 잔의 차를 나누며 나는 행복해했다. 그것은 고향이 주는 안온함과 형이 주는 넉넉함 때문이었다.

사람은 한 평생에 몇 사람이나 만나고 가는 것일까? 스쳐가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영혼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교류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복될 것이다. 나는 형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형의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늘 행복했다. 그런 점에서 형은 내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상개 형이 회갑을 맞았다. 오늘날의 회갑은 출발을 뜻한다. 지난 60년은 연습이었다. 프로 선수는 본 게임을 위하여 오래 연습한다. 시에서의 프로인 형은 이제부터의 개화를 위하여 오랜 경험과 고생 그리고 연습을 거듭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에 있어서의 형의 앞날은 과거의 시련을 딛고 성취와 영광이 이어지리라고 기대한다. 그것이 학하고 바르게 세상을 살고 시를 써온 형에 대한 세상의 올바른 보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개 형께

 

 

정영태

 

 

지루하던 올겨울도 이제 거의 끝나 가는가 보오.

벌써 입춘이라니 노란 개나리가

나의 칩거와 게으름을 비웃으며 온 누리에 활짝 필 때도 멀지 않았다오.

1970년대 초반 에 우리가 만나서 통음을 즐기고 난 지 벌써

몇 번의 봄이라니요 그 많은 겨울은 겨울은 또 어쩌구요.

늘 주석에서 입빠른 소리로 마음을 상하게 하던 이 아우를

웃는 낯으로 거두어 주시던 너그러움과 어짐을 베풀어 주시던

형이야말로 인격 그 자체로 보인다오.

형은 법 없이도 잘 사실 분이지만 이 세상은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형에게로 다가와 일일이 괴로움을 끼쳐드리는구려

그래도 어쩌겠소. 주어진 시인의 길을 묵묵히 질 수밖에

시인의 길이 이 세상에서 고달프고 어렵긴 하지만

묵묵히 험한 길을 견디어 온 형의 걸음은 후배들에게 이어져

길이 빛날 것이오. 시혼이 영원이 이어지듯이

흐트러지지 않던 형다운 시인의 자세는 결코 값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이 못난 아우의 가슴속에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빛나고 있다오

요즘도 약주 때문에 출퇴근 기차역을 자주 지나치시는지요?

봄도 다가왔으니 떡두꺼비 같은 형님의 얼굴과 마주 앉아

한잔의 꽃술을 기울이며 형님의 약을 올릴 기회가 몹시 기다려진다오.

그때까지 이 못난 아우의 칩거를 용서해주시구려.

 

 

 

 

死海

 

 

나를 바다라 부르지 마라.

바다 밑의 바다.

바다이기를 포기한 진짜 바다.

 

꿈도 없다. 사랑도 없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 하나.

이 세계를 소금 덩이 속에 절여버리는 것.

그리하여 영원한 나만의 차지로 삼는 것.

 

이유가 뭐냐고?

나야말로 진정한 테러리스트.

즐거움을 위해 지구 하나쯤 허비해도 좋다.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 맹목의 테러리즘.

그러기에 소금은 더욱 순수히 정련된다.

지상의 눈물을 죄다 모아

나만의 정련하여 맛보는 순백색 결정체.

 

내 순결한 눈을 들여다보라.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은

그래서 눈물 한 방을 흘려보지 않은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있느냐.

 

오너라, 요단강의 민물아.

나를 달랠 수 있으면 달래 보라.

이 증오와 분노, 그리고 적의는

이제 나도 어쩔 수 없다.

 

바다에서 도망쳐 나와

뭍으로 올라온 또 하나의 바다

시시한 맹물과 섞이기를 거부한

사내다운 사내의 바다

 

나를 바다라 부르지 마라.

바다이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진짜 바다를.

 

 

 

 

 

 

 

 

 

 

 

 

 

 

 

 

 

 

 

 

 

 

 

 

 

 

 

 

 

빛남학원

 

 

서규정

 

 

이상개 선생님을 이야기하자면 목서분 여사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 같다.

선풍기도 돌다 쉬어 가는 어느 해 푹푹 찌는 여름이었다.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람이 빛남 사무실 문을 우람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섰다. 원고뭉치를 옆구리에 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새벽에 맺힌 이슬이 이 세상의 꽃을 가군다는 진리를 단단히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같아 보였다.

자신은 공무원인데, 아이들을 가르칠 지침서를 나름대로의 경험과 노하우를 통하여 축적하고 연구해 왔노라고, 이것이 책으로 출간된다면 자식 가진 부모라면 탐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요지였고 대충 자비출판의 견적서를 곁눈질하더니 부득부득 선 인세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글쎄요!

선생은 별 대구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 목서분 여사께서 둘 다 답답하게 보였던지 참견하고 나섰다. 출판사 사정부터, 출판시장, 영업배포망 등을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그 작가는 애초의 생각을 고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중앙일간지 하단 두 뼘쯤 되는 「통광고」에 실린 자신의 프로필과 사진을 의식하지는 약간 약이 올라 있었다. 그러자 여사께서 “쓰는 사람이야말로 글자 하나와 피 한 방울을 맞바꾼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수 만종의 책 속에서 당신님의 책만 유독 눈에 띈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독자의 구매력과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출판하려는 사람 치고 자신의 글이 남보다 뒤쳐진다는 생각을 죽어서도 안하는 사람들이 요즈음에 글을 쓴다. 개개인의 몸살일 뿐이다.”

순간 귀를 막고 싶어졌다. 우째 저리 통렬한 말을 누구 들으라고 하시나! 출판 경력 20년에 맺힌 한(?)이 서린 내조자의 강변이 저린 것이로구나. 그 말이 지금도 귓속에 오래 살고 있는지는 아마 여사께서도 모르시리라.

 

다시 이상개 선생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고시회를 밝혀야 한다.

얼핏 듣기엔 사법고시 동문들의 모임채로 보이기도 하나, 빛남 사무실에 한 번이라도 들려본 사람이라면 이맛살 찌푸리기에 알맞은, 자욱한 담배연기 속의 집회. 만약에 불란서 문화원의 한 직원이 들렸다가는 부산의 레지스탕스로 오해하기 딱 좋은 진지한 밀회, 패치기 혈투를 벌이는 고스톱 멤버들을 일컫는 말이다.

출판업계가 어렵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출판 없이 명맥을 유지해 갈 여러 가지 요인 중에 “오는 손님 떨어뜨리기”에 이 고시회는 지대한 공헌을 한 바가 크고 판 깔아놓고 호객행위를 일삼는 나의 죄는 죽어서도 신원이 될 것 같지가 않다.

그 멤버들의 설명을 일일이 공개했다간 중앙동에 발붙이기 어려워질 테니까. 가장 왕성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임명수 시인부터 한 때는 기이한 무용의 손놀림을 자랑하던 앞 뒤 패 모르는 김형술 시인까지 수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다.

물론 돈을 따서 주머니에 넣고 가는 사람은 없다. 시인들의 놀이터가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남의 생업장을 놀이터로 착각하는 것도, 사실은 갈 곳 없고 쉴 곳 마땅찮은 길 잃은 양(?)들이 또 시인들 아닌가 싶다.

중앙동은 그렇다. 가을 플라타너스 잎이 지면 썰렁한 곳에 나타나시는 폼들이 속취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시 또한 허망과 허무를 즐겨 공양하는 어쩌면 禪的인 작업 아닌가. 또 하나 멤버들이 나타나실 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하나같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화학적인 사고의 틀을 잡으셨나 하는 점이다.

화투 칠 때 보면 좋은 대는 죽어도 내놓질 않는다. 패 한 장으로 고스톱 판의 전복을 꿈꾸기라도 하시는가 모를 일이다.

나는 한 때 빛남이 사무실을 두 개나 쓸 때 고시회 멤버들과 고스톱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저 세상으로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실패한 연애의 상흔은, 젊은 날 억지로라도 입어보고 싶은 객기의 상처와는 다르다. 죽느냐 사느냐 식의 햄릿 세리프가 입에서 기어 나올 만큼 인생항로에 무지막지한 타격을 입었었다. 직장도 때려 치웠고 세상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고 화투 패를 쥔 손이 덜덜 떨리던 시절이었다.

판 위에 화투짝 한 장 한 장을 칠 때마다 무엇 무엇에 대한 “애도”처럼 힘차게 내리쳤다.

깨어진 연애에 대한 복수나 하는 것처럼 희열이 있었다. 화투는 애초에 짝을 먹는 놀이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짝을 잡아당겨 쓰리 고에 피박을 씌워도 가버린 여자는 오지 않았다. 새발의 조율도 안되고 이 방에서 3분 저 방에서 5분 들락날락거렸다. TV 동물의 왕국을 보더라고 짝짓기기 아닌 짝 찾기를 하는 짐승들은 대대적으로 인상이 찌그러지고 등이 구부러지기 마련인가. 그 무렵 나는 영광스럽게도 하이에나란 닉네임도 얻었고 고시회가 날 살렸다는 데에 여전히 감사하고 있다.

 

이제 이상개 선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전라도에서 양산으로 닌자처럼 숨어들어 피혁공장에서 암약(?)을을 하던 천신만고 끝에 시인이란 이름을 얻었고, 후배 백학기가 준 정일근이란 명함 한 장을 쥐고 중앙동 골목에 나타나 빛남을 찾아온 게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때 강영환 최영철 시인들을 만났고 10년이란 세월이 소주한 병 마시는 시간보다 빨리 흘렀다. 그 사이 IMF도 있었고 대통령 선거도 있었지만 선생은 위 두 가지 상황에 대해서 일언반구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궁극적으로 좋은 사람이 뽑히고 경제위기가 넘어가기를 바라는 그런 눈치셨다.

각각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한다고 해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대통령이 뽑히고 경제회복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참 미안한 일이지만 그 무렵 한 마디씩 주장하던 면면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분들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답답하면 예측불허의 추리가 발달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난 조용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원래 내 속에 불티가 가득 쌓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용한 품성을 지닌 여자가 좋고, 말이 없는 후배가 좋다. 그런데 선생은 말을 삼키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에 깔린 외상값 달란 소리 못하고 항상 쪼들린다. 아니 어쩌면 계산을 못하는 게 아닌가 부쩍 의심이 갈 때가 많다.

이제 나는 빛남에 들락거리지 않는다. 아예 눌러 산다. 그러면서도 저만큼 서라! 소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빛남 컴퓨터도 내 것이나 마찬가지로 사용한다. 참 미안한 일이다.

지구상에 수억의 인구가 살아도 단 두 종류의 이간상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어떻게든지 남에게서 1원이라도 이득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과, 단 1원이라도 손해를 봐야 시원한 사람 둘 뿐이다. 이 시원하다는 청량감이 담긴 삶을 선생은 아마 저승까지 가지고 가시리라 본다.

 

 

차라리 천 개의 의지로 된 우상 앞에는

퇴색한 삶이 햇살을 퉁기리라

고립의 성벽 헐린

미래를 보고 구도

너부죽이 열을 삼키는 분만 앞에

숨결과 지문이 찍힌 화석을 남긴다

 

- 鑄型製作 - 중에서

 

 

선생의 데뷔작 끝 연이다. 나는 이 시를 우리나라 광물시의 한 효시로 본다. 맛과 멋이 곽 짜여지는 밀도의 시다.

 

 

 

 

 

 

 

 

 

 

 

 

 

 

 

 

 

 

 

내가 본 이상개 선배님

 

 

차달숙

 

 

내가 이상개 선배님을 알게 된 것은 90년대 초 재부마산고등학교 동창회 간행위원으로 일하면서 안기태(국제신문사 편집위원) 화백의 소개로 만나 그날 이후 지금까지 선배님과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됐다.

이상개 선배님은 나의 첫 칼럼집 「마음 따라 달라지는 인생살이」의 출판을 맡아주셨고, 선배님을 통해 임명수님을 비롯한 서규정, 서정원, 배재경 시인 등 많은 분들과 교분을 나누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李선배님의 첫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별 말이 없고 인정도 없고 결단성도 부족한 무척 답답한 분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사람은 오래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다.

李선배님은 알고 보면 첫인상과는 정반대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새록새록 정이 가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강단 있는 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돈을 벌 수 있는 기능성과 확률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고 바꾸어지기도 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때 우직하게도 李선배님은 돈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13년동안 우리 지역 시인들을 위해 멍석을 깔고 잔치판을 만들어 왔다.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일하는 사람을 우리는 프로라고 한다. 프로가 가는 곳에 돈이 있다는 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진정한 프로는 자신의 일을 통해 돈 이상의 의미를 창조하고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李상개 선배님은 누가 알아주지 않는 요즘 시세 말로 돈되지 않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부산지역 문학도들의 본이 될 만한 등불과 같은 삶을 소망하며 성실히, 풍성한 결실을 준비하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신 李선배님은 지역문학출판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부산시인들의 작품집을 400여종 발간하였고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지평>을 발행하는 등 1990년대 부산지역 문학의 소중한 업적을 남겼고, 그의 사업장인 빛남출판사는 시인들은 물론이고, 부산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항상 개방되어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자기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각과 순수한 시인의 자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인간 李상개 선배님의 삶은 봄꽃으로 비유하자면 감나무꽃과 같은 분이라고 평하고 싶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거나 향기롭다고 찬찬하는 사람은 없다. 모양도 시원찮고 빛깔은 촌스럽고, 푸른 잎사귀에 치어 어느 구석에 있는지 도무지 아아 볼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러나 가을에는 소담치고 빛깔도 고운 열매가 가지가지마다 가득 하다.

무서리 내리고 갈잎이 떨어진 후 푸른 가을 하늘 닿는 곳에 빨갛고 투명한 자태를 고고히 자랑하는 그 열매는 달디 달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듯이 李상개 선배님의 그 인격이 투명하고 달고 존경스럽다.

 

시인이 되고 싶은 자유의지와 책을 출판한다는 직업인의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인생을 잘 가꾸며 살아가는 李상개 선배님과 그의 가정에 내내 안강하시기를 기원 드리면서 회갑을 맞아 회갑기념문집을 발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회갑은 제2의 인생이라 생각하시고 신인(新人)의 기분으로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주는 도서출판과 작품을 기대합니다.

선배님, 그 동안 정말 감사합니다.

 

 

 

 

 

 

 

 

 

 

 

 

송제 이상개 시인의 회갑에 부치는 글

 

 

김상균

 

 

몇 년 전만 해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만물불이(萬物不二)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들먹거리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송제 이상개 시인과 일전에 모처럼 부산 문인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는 한길 선술집에서 청탁(淸濁) 불문으로 거나하게 마시고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사랑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고 만물불이가 아니면 법(法)도 개똥도 아니라고 마치 진리가 자신만의 전유물인양 혼자 떠벌렸는데도 언짢은 내색은커녕 재미있다는 듯 귀를 열고 경청하던 송제 시인을 보고, 세월도 많이 흐르고, 인생도 많이도 익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날 송제 시인과 한길 사장님과 모처럼 단촐하게 아무 부담 없이 아주 기분 좋은 술자리를 끝내고 귀가 길에 송제가 내 손에 덥석 쥐어준 자신의 시화 액자 “별이 달아난다”와 “시와 자유”라는 시선집에서 시적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마음에 찡하게 와 닿는 시구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

 

 

-중략-

철사를 구부리고 또 구부리면

코끼리나 나무나 비행기로

혹은 물고기로 둔갑하는 철사

우리는 아직도 철사의 힘을 모르고

모르는 신의 얼굴만 찾는다.

 

-「철사를 위하여」중에서

 

 

-중략-

잎사귀에 푸들거리는 심해의 맥박은

중앙동 가로등 불빛처럼 출렁거린다

뚝배기의 멸치떼가 팔딱거리며

우르르 몰려나와 반겨준다

 

-「멸치 쌈밥집」중에서

 

 

-중략-

별을 사랑 하면서도 별을 잡아먹는다

그런 인간들이 무서워

오늘 밤도 별들은 달아나기 바쁘다

별들은 인간이 무섭기만 하다

 

- 「별이 달아난다」중에서

 

 

이처럼 시공을 드나들면서 물과 불이 서로 어울려 물이 불을 잡아먹고 물이 불을 끓이고, 불이 물을 얼리는 유무생사나 음양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원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니 하는 일이 없는 무위자연의 법을 노래 한 것 같아 기쁜 마음이 하늘을 덮고도 남을 듯했다.

시를 쓴다고 해도 우리들의 고향이 창원 봉림리나 동읍 석산리만 알고 우리들의 참 고향이 원점이고 본래자리라는 것을 모르면서 다 안다고 큰소리치는 많고 많은 사람들!

우리들 모두가 시궁창에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반작이는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그 얼마나 되겠으랴만 송제 시인은 고향이 원점인 줄 알고 가슴속에 담아둔 고향 하늘의 별이 명멸하는 변화를 읽을 줄 알고, 밤과 낮의 경계에서 먼동이 터 오는 회색 빛깔의 소리를 볼 줄 알고, 양극이 서로 통하여 오지도 가지도 않는 자리,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지만 정말로 크고 거룩한 하나로 무시무종(無始無終) 원동태허(圓同太虛)하게 계시는 그 님을 껴안을 줄 아는 시인이시니 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리요! 아마도 쇳물도 마시고 눈물로 강물을 흐르게 한 삶이 고아낸 송제의 진솔한 외침이리라.

장하도다 송제 이상개 시인이여!

화갑을 맞기 오래 전에도 사랑이 진리라는 걸 헤아리고 계셨던 송제였지만 화갑을 전후해서 생사 유무가 둘이 아닌 하나를 본 것 같고 중도(中道)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허공이나 침묵을 헤아린 것 같아 너무나 감사하고 뛸 듯이 기쁘도다.

<시와 자유>란 책 말미 “시가 뭔지”라는 산문 중에서

 

“ - 중략 - 이 처럼 자연과의 합일을 이룰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절정을 맛볼 것이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된 물아일체의 경지에서는 하나가 전부고 전부가 하나라는 현묘(玄妙)한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순순히 맡기고 살아서도 죽음을 보고 죽음이 없는 영생의 희열을 맛 볼 수 있지만, 둘로 나뉘어 갈라서면 서로가 원수로 때로는 사기꾼으로 내몰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암흑의 나락으로 돌변 시킬 수 있는 고약한 세상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나는 비록 시적 문외한이기는 한 시란 모름지기 하나로 거룩한 님의 끝없는 사랑과, 걸림 없고 막힘없는 자유 평등 평화를 목이 터지도록 노래하고 춤을 춰야지 고약한 말장난으로 순진무구한 양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산란케 하는 시는 결코 좋은 시라는 생각도 아니 들지만 세인에게 읽히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왔다.

 

송제 이상개 시인은 저와는 피를 나눈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신사년 동갑네기 이자 내외종간으로 몇 달 앞서 세상에 나온 외사촌 형님이시다.

금년에 화갑을 맞았으니 옛날 같으면 할아버지 반열에 들어선 지도 오래될 나이지만 우리들에게도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난 뒤 산더미 같은 잡동 더미를 파고들며 숨바꼭질에 신바람이 났고, 송제의 고모 집(창원 동읍 석산리)앞 주남저수지에 큰 가물로 물이 찾아드는 여름이면 커다란 대 소쿠리와 가래를 들고 물고기를 쫓고 맨 발로 물속의 진흙을 밟아 미끈적거리는 느낌으로 대칭이(민물에 사는 큰 조개)를 줍고 물장구 치고 버들피리를 불던 철부지 시절이 어언 반세기란 타임캡슐을 타고 떠내려가고 있다.

철모르고 걱정 없이 지날 어린 시절, 저는 부모님과 8남매가 하루 두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형편인데 송제 이상개 시인은 부친께서 3마력짜리 발동키로 쌀만 찧는 조그만 방앗간을 돌렸기에 그런대로 밥걱정은 하지 않고 흰 쌀밥 먹고 지낼 수 있어 방학만 되면 아예 봉림 외가댁으로 가서 그토록 먹고 싶던 하얀 쌀 밥도 얻어먹고 송제와 송제의 남동생 영수와, 상균이 셋이 어울려서 버드나무나 기죽나무에 납작 엎드려 여름을 노래하던 매미를 못 살게 굴고, 무더운 여름 한낮이면 발가벗고 웅덩이에 첨벙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고, 목이 마르면 맹물 한 바가지에 꿀아제비(사카링)를 타서 벌컥 벌컥 들이마시며 꿀맛으로 알던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송제가 마산중학에 다닐 때 부친이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정미소를 그만 두고 얼마 안되는 논 밭 마지기로 3남 1녀와 조모님과 어머님, 여섯 식구가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래도 송제 시인은 타고난 머리가 있어 마산 고등학교에 넉넉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재학 중에도 시적인 재능을 발휘 하며 시작(詩作) 활동에 정성을 쏟았기에 다들 상개가 장래가 촉망 되는 문인으로 대성 하리라 여겼지만 그 놈의 돈이 뭐 길래 대학 진학을 포기 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 것이 아직도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삼류 인생으로 낙인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송제 이상개 시인이 그때 대학 졸업장 간판만 달았더라도 벌서부터 이름 잇는 대학 강단에서 시론이나 동서양과 시공을 넘나드는 탁 트인 시문학을 열강 하거나 시를 쓰면서 밥걱정 없이 자신의 길을 마음 놓고 달려가 큰 꿈을 이루고, 보다 많은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 보다 크고 바론 생각의 물길을 터놓았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생각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청난 좌절에도 송재 시인은 희망을 꺾지 않고 배우고 익히는 일에 부지런 했다.

호구지책으로 부산공업전문대학 부설 기술 양성소에서 1년 과정의 기계 기술 계통의 이론과 기능을 익힐 때 본인과 전포동 판자촌의 허름한 방 한 칸을 세를 내어 6개월 동안 어설픈 자취 생활도 함께 해보았다. 바짝 마른 김 한두 장을 연탄불에 굽고, 간장과 찌든 김치로 허기를 때우며 각자의 갈 길인 양성소로 교육대학으로 드나들며 밤이면 연탄 방 보금자리를 찾던 판잣집 한 칸 셋방이 아직도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미지근한 열기가 세월을 거슬러 오는 것 같다.

본래 시인의 성격에 기계라는 혼처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지만 입에 풀칠을 아니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기술학교의 연수과정을 마치고 진해 해군 공작창에서 일 년 남짓 기계를 다루는 머슴살이를 하다 말고 부산에서 배고픈 시인의 삶을 시작했다.

그럭저럭 나이가 차서 노총각이 되니 외숙모님 등살에 못 이겨 변변한 돈 벌이도 없이 첫 장가를 들었으나 살림살이 보다는 시를 사랑하는 성미라 경제를 모르는 결혼 생활은 얼마 못가서 실패하고 기약 없는 또 다른 인생 여정을 시를 보듬고 걷던 중 시를 사랑 하던 오늘의 대청동 한길 사장님을 백년가약의 배필로 만인의 축복과 박수갈채 속에 새 보금자리를 틀어 두 딸을 거느린 탈 없는 가정을 꾸려가고 있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리요!

한길 사장, 우리 형수님 돈도 안되는 시인의 품에 말 못할 경제적 어려움도 눈물로 말리고 시인의 가난한 가정을 잘도 건져내신 형수님께 어떤 말로도 이에 합당한 칭송의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소. 성실하고 묵묵히 가난을 꾸려 가신 우리 형수님 정말 장하고 큰 일 해 내셨구려.

송제의 오늘 있음이 형수님 내조로 더욱 아름답고 빛났습니다. 시인이라고 방랑 시인 난고 김삿갓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라는 법은 없지만, 시가 읽히지 않는 우리 처지에 직장 없이 시만 써서 제대로 밥 먹고 사는 시인을 과연 몇 손가락을 셀 수 있으리오! 시가 읽히고 노래가 팔리고 춤이 신바람이 나는 열린 세상이 될 때 이 세상은 한결 아름답고 윤택해 질 텐데 우리의 처지는 언제 그런 세월을 구가 할 수 있으랴!

본래 돈 안되는 시작(詩作)에 시집을 주로 출판하는 빛남 출판사의 경영이 생활에 보탬은커녕 생돈을 축내는 형편에 남 흉내 내면서 살아가시기가 얼마나 힘드셨는지요? 그 고달픔 아니 듣고도 헤아리고도 남겠소.

송제 형님! 지난 몇 년 동안 부산 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이런 저런 씀씀이로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게 어려워도 문인이 가야할 길임을 스스로 헤아리고 굽힘없이 가실 길을 묵묵히 개척해 가시는 송제 형님의 삶이 이제사 더욱 의연해 보이고 더욱 커 보이기만 합니다.

본인이 가장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송제 시인이시여! 항상 넉넉한 마음으로 이 땅을 밝고 아름답게 불 밝힐 찬란한 시편들을 콸콸콸 쏟아내소서! 제 마음 비울 줄 모르는 동포들을 눈뜨게 하고 열린 마음 되게 해 주옵소서!

여기 화갑 기념으로 고종제(姑從弟)가 평소 마음에 담아둔 시 한 편을 송제 형님의 화갑을 기리어 엮어 올립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날마다 좋은날 되셔서 앞날의 영광과 축복을 한길 형수님과 백년을 함께 하소서! 천수를 누리소서!

 

 

하나로만 오시는 님

 

 

만상(萬相)을 하나로 보는 법(法)공부 하자

하나 되는 법 공부는 마음공부라

한 마음 열고 보면 지옥도 천국

한 마음 닫고 보면 천국도 지옥

원융무애 원동태허(圓融無碍 圓同太虛) 진실한 모습

하나로만 오시는 님 허공의 몸짓

눈과 귀가 못 보고 못 듣는 비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에 님을 보리라

 

만상(萬相)을 하나로 보는 법(法)공부 하자

하나 되는 法공부는 만물불이(萬物不二)라

색과 공이 어우러진 가없는 하늘

하나로만 오시는 님 포근한 사랑

님의 품에 한 몸으로 짝짓는 기쁨

허공에 차린 신방 운우(雲雨)의 교성(嬌聲)

혼불로 녹아내린 황홀한 만남

소리 너머 한 소식에 님을 보리라

 

만상(萬相)을 하나로 보는 법 공부 하자

하나 되는 법 공부는 숨질에 있어

끝없는 들숨 날숨 명줄을 이어

하나로만 오시는 님 경배 하리라

지극정성 님 모실 간절한 기도

하늘이 땅을 품는 땅울림 소리

끊어질듯 이어가는 생명의 신비

옴마니 반메훔에 바라춤 추리

 

만상을 하나로 보는 법 공부 하자

하나 되는 법 공부는 영(空)에서 시작

하늘가지 달려가도 얼굴 없는 님

해면체 부푼 살점 풀밭에 뉘어

밤새워 주고받는 뜨거운 열정

 

하나로만 오시는 님 환희의 절규

줄탁동시 이룬 절정 죽어도 좋아

사랑을 쏟아 붓고 열반에 드네

 

 

-송제 이상개 시인 형님께서 항상 건강 하시고 가정엔 맑고 향기로운 웃음꽃이 만발 하소서!

2001년 4월 부산고에서 知一無去 金祥均이 松濟 李祥介 시인의 華甲기념에 바치는 노래

 

 

 

♧ 詩에 나오는 用語 解說

 

 

◆ 하나 : 주객미분(主客微粉)의 물아일체(物我一體)로 만물불이(萬物不二)의 하나다. 유무 생사 대소 고저 명암 음양 등의 모든 상대적인 차별이 무너진 중도(中道)의 하나다. 이 하나가 삼계(三界)의 생사를 다스리는 거룩한 님(하나님)으로 무심이고 본래자리이고 진면목이다. 이 하나는 원동태허(圓同太虛)하고 무흠무여(無欠無餘)한 실상무상(實相無相)의 얼굴 없는 님이다. 이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하나로 그 현묘한 성품을 헤아려 불성이나 성령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만물을 하나로 보는 만물불이(萬物不二)의 정지견(正知見)에 이르러야 심안(心眼)이 열려 성품을 헤아릴 수 있다. 하나를 헤아려 자성을 보는 데는 열불이나 기도에 매달리더라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수 없으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 하나를 헤아릴 수 없다. 누구라도 이 하나에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면 성령을 받고 성품을 깨달아 하나님과 부처님을 철견하고 끝내는 구경(九竟)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

◆ 원융무애 원동태허(圓融無碍 圓同太虛) : 자성(自性)인 불성(佛性)과 성령(性靈)의 참 모습은 법계(法界)에 어느 한 곳에도 빠짐없이 평등하게 가득 차 있으므로 그 모습이 둥근 원처럼 시작도 끝도 없고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서로 다툼 없이 하나로 융화 되고 뒤섞여 크고 둥글고 텅 빈 허공과 같다고 하여 원융무예 원동태허라고 일컬었다.

◆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또 다시 일보를 나아가면 떨어져 죽는 일 밖엔 다른 도리가 없는데 이 일이 아니고서는 자성(自性)인 불성이나 성령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함은 이 일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비약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는 오로지 별지를 남김없이 버리고 전부가 하나고 하나가 전부라는 만물불이의 진리를 깨달아야만 하나로 거룩한 불생불멸의 님을 철견 할 수 있다. 백척간두에서 떨어져서 (卽今)의 내가 죽고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영원을 살아가는 비밀을 간직하고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이니 이것이 곧 해탈이요 성령을 받음이다.

◆ 만상(萬相) : 번뇌 망상에서 지어내는 형이상하학적(形而上下學的)인 관념인 유무 대소 상하 장단 고저 생사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차별심이나 영지(領地)와 지수화풍의 사대가 공(空 = space)에서 인연을 만나 생기는 대우주 속의 모든 천체(天體)나 유생 무생의 동식물이나 광물 흙 물 불 바람 빛 등을 통 털어 만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라서 실존하는 모든 형상은 허망하다는 이치를 꿰뚫어야 불생불멸의 진리의 길에 들어 참 사랑을 간직하여 이롭게 쓸 수 있다.

◆ 님 :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원동태허(圓同太虛)하게 자재하는 성품이나 성령을 님으로 불렀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으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중도(中道)의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나타내는 님이다. 이 님은 허공과 같아서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안목(眼目)이 열린 사람에게는 하나가 전부고 전부가 하나라는 이치를 읽고 하나 안에 두루 갖추고 있는 님인 자성(自性)을 언제 어느 곳에서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언설(言說)로는 이 이치에 이를 수 없는 일이라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스펜서의 제일 원리인 원점(原點 - Primary Point)으로 우주 탄생의 단초(單初)인 본래자리나 마음자리를 일컫는 말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님이다.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혜안(慧眼)이나 불안(佛眼)으로만 볼 수 있는 님으로 허공, 무심, 일심, 본래자리, 마음자리, 진여, 여여, 성품, 자성, 성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늘 하나로 거룩하게 계신 한님이시고 부처님이신 일물(한 물건)은 원동태허(圓同太虛)하고 무흠무여한 자성이라서 이를 있다고 해도 그르고 없다고 해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아 육조(六曹) 혜능선사가 이를 본래무일물인 일문(한 물건)로 드러내 보인데서 유래된 용어.

◆줄탁동시(啐啄同時) : 닭이 알을 품고 3주가량 되면 병아리 새 삶을 얻었다는 신호로 계란 껍질을 톡톡 쪼는데 이게 톡톡 쪼는 줄(啐)이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어미 닭도 바깥에서 탁탁 쪼아주니 이게 탁탁쪼을 탁(啄)이다. 이는 선문(禪門)에서 스승과 제자가 실기(失期)하는 일 없이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일체가 되어 법맥(法脈)을 잇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줄탁동시는 교육이나 가정생활, 운동 예술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고 심지어는 부부지간의 운우지정에서도 영락없이 들어맞는 도리라고 한다. 줄탁동시로 제자는 스승의 인가를 받고 큰 그릇이 되어 법맥을 이어간다.

 

◆옴마니 반메훔 : 옴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표현하는 소리이고 마니는 진주 같은 보물을 일컫고 반메는 연꽃을 의미 하고 훔은 첫 소리인 옴과 합하여 제2의 화음을 창출할 때 서로 다른 소리가 부딪혀 내는 제2의 소리이다. 옴마니 반메훔은 남자와 여자란 뜻도 내포 하고 있어 음양이 줄탁동시에 조화롭게 화합 되어 법열을 느낀 경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색과 공(色空) :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마하 반야 바라 밀다 심경의 한 구절. 색이란 드러나 있는 모든 물상이나 관념들을 총칭하고 공이란 텅 비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불교의 종지가 실상무상이라서 존재가 비존재요 비존재가 존재라는 만물불이의 진공묘유를 헤아려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는 진리를 깨달아 어디에도 막힘없고 걸림 없는 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열반(涅槃) : 불교 수행으로 미혹과 집착을 끊어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 의역(意譯)으로 멸도(滅度)나 적멸(寂滅_로도 불린다. 열반의 본래의 듯은 ‘불어서 끈다’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써 꺼 일체의 번뇌망상이 끊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진공묘유의 진리인 중도를 헤아려 어느 곳에도 막힘없고 거침없는 대 자유의 큰 사랑을 뜻한다. 열반에는 생존 동안에 얻은 유여(有餘) 열반과 입적(入寂)과 동시에 얻은 무여(無餘) 열반이 있다.

◆ 소식 : 본래무일물인 마음자리, 원점(原點), 무심, 성품, 성령을 드러내는 참 진리의 소식, 이 소식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서 경설로 이를 수 없는 일이지만 지극정성으로 매달려 무심삼매(無心三昧_에 들면 소리 너머 한 소식을 듣고 사자후를 토한다고 한다.

 

 

♧2001년 4월 16일 송제 이상개 시인 화갑 문집 출판 기념에 姑從弟 知一無去 金祥均 解設 提供

 

 

 

 

 

소주 - 백세주 - 맥주 - 사이다

 

 

강경주(시인)

 

 

1974년 초여름 저녁 영등포역 앞에서 나는 상개형님을 만났다.

밖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고 나를 보자 그는 대뜸 앞장서서 담배연기 왁자한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가 나왔고 한참을 말없이 고기안주에 술만 마셔댔다. 낯설고 외로운 서울에서 하늘같이 높은 선배가 사주는 술과 밥과 잠자리까지 그렇게 영등포에서 나와 가리봉동 자취방까지 술자리는 이어져 가리봉동 포장마차에서 상개형님, 정대현 그리고 나는 새벽이 훤-할 때가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어느 문구재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고 정대현은 현대시학사에 출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 선배들은 모두 등단을 거쳤고 나는 너무 힘들고 버거운 그 등단절차에 멀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내게 종종 동인지(『잉여촌』등등)며 시집들을 몇 권씩 주기도 했고 가끔씩 문단의 근황들을 얘기해 주기도 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전포동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무척 지쳐보였고 힘들어 하는 것 같았고 사회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많은 실망을 얻은 것 같았다.

자연히 술자리는 빨리 끝났고 나는 인턴 ․레지던트 생활에 들면서 또 그와 한참동안 만남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한결같다. 대책 없이 좋기만 할 뿐 똑 부러지는 표현 없이 조용히 낮은 소리로 달래듯 얘기하는 화법이 오히려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고 팔딱거리는 동료 ․ 후배들을 더 기죽게 만드는 것이다.

애증의 표현이 별로 드러나지 않듯 호ㆍ불호가 쉽게 나타나는 법이 없듯 나는 지금도 그가 많이 어렵다. 오죽하면 말없이 듣기만하다가 맨 나중에야 던지는 한마디 “니 알아서 해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이 말이 제일 두렵고 어렵다. 그런 엄격하고 어려움이 더욱 그에게 끌리기도 하고 또 어렵게도 하는 것이리라.

목경희 형수님은 늘 내게 친구 같고 누님 같다. 형님은 늘 어딘가 어렵고 불편하지만 형수님은 늘상 정답고 살뜰하고 편안하다.

<한길>에는 이렇게 항상 한길로만 보고 한길로만 살아가는 사람들로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다.

즐기던 술이 그 도수가 자구만 내려가고 있다. 소주에서 백세주로, 백세주에서 또 맥주로 두 자리 수의 도수가 어느덧 한 자리수로 내려앉았다. 세월타령하기엔 한참 어린 후배지만 올백에 돋보기를 쓰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저 옛날의 가리봉동 시절의 그가 생각난다. 그는 늘 미혼이었고 눈이 맑았고 걸음이 바르게 말이 없었다. 외유내강의 본보기처럼 지금도 “니 알아서 해라!”하고 조용히 후배들을 꾸짖는 모습을 보면, 대로는 거짓이 더 많고 때로는 교만에 가득 찬 부산시단에 그의 결벽증은 빛남출판사보다 더 빛나 보인다. 제대로 된 출판사 하나 없던 부산문학계가 비로소 그로 인하여 자존심을 가질 수가 있었고 많은 좋은 훌륭한 부산의 시인들이 비로소 그로 인하여 이름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비록 맥주에서 다시 사이다로 도수가 더욱 내려가더라도 그는 중앙동에 한길에 그대로 빛나고 있어야 한다.

어느 정수기의 물처럼 깐깐하고 맑고 건강하게 자리 잡고 계셔야 한다.

나는 가끔 속으로 그에게 전화하고 싶어진다.

“형님! 심심한데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그러면 아마 그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니 알아서 해라!”

상개 형님! 감사합니다.

형수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흐트러진 모습이 좋다

 

 

박홍배(문학평론가)

 

 

인간인 이상 모든 사람들은 완벽할 수 없다. 대개는 이런 저런 흠집이 있게 마련인데 그 흠집도 때로는 그 사람의 전체 이미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멋에 깔끔하고 실수 없는 사람들 곁에는 친구들이 잘 모이지 않는 법이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기 어렵다고 했던가. 요즈음은 옷차림에서부터 행동들까지 지나치게 흐트러진 모습들이 젊음의 대변인 양 우리 주위를 활보하고 있는 세상이다. TV속의 온갖 오락물들에는 코미디언뿐만 아니라 탤런트나 가수들까지 나와서 난 바보입네 하고 설치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취중이든 특정한 때이건 간에 한 번씩 흐트러진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오히려 그 인간미가 돋보이게 되는 상황을 종종 본다. 그럴 경우 이런 말들로 대신 된다. “아니, 그 사람 의외로 재미있더라.”라든지, “그 사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던데.”라는 말들이다. 이상개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면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처음 받은 이상개 선생님의 인상은 그 연세에 어울리는 아주 신사답고 인정스러운 분 정도였다. 조용조용한 말씨, 상대방에 대한 배려, 거기다가 내면적 위엄을 감싸 안은 듯 한 선량한 외모 등이 퍽 호감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다감하고 인정스럽게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버지뻘에 가까운 연세였지만 마치 가까운 친구를 대하듯 격의 없이 말씀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모두에게 대하는 인간미 넘치는 정 때문이다. 아마 빛남출판사를 드나드는 문인들 거의가 느끼는 이상개 선생님의 인상은 ‘사람 좋은 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 좋게 모두를 대하다보니 자연 경제적으로는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출판을 의뢰하는 문인들 사정을 일일이 들어주다가 별 이익도 없이 책 한 권 찍어내고, 그래서 직원 월급도 변변히 못 주면서 십 수 년을 버텨오는 실정이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지금껏 돈을 번 책은 정순영 시집 『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와 이충기 시집 『기다리는 나무』두 권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분이시지만 약주가 얼콰하니 분위기를 잡으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그렇다고 술판 분위기를 해치는 주사가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처럼 말씀이 많아지는데, 그 말씀이 그분 특유의 주석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조용조용한 말씨라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은데 취기가 오르면 혀 꼬부라진 말씨로 반 이상의 말은 알아듣지도 못한 체 주석의 우리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런 중에도 아무리 취중이지만 남의 험담을 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남 좋게 말하는 것도 그분에게 무의식적으로 생활화된 장점이 아닐까 여겨진다. 취기가 기준치를 넘으면(사실 그분과의 주석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다) 동석해 있는 이들이 맨 정신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신경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그분에게서 보지 못했던 흐트러진 모습에 점점 인간미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럴 때쯤이면 아무리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년배 이하이면 공대를 하는 법이 없다. 동년배는 치구가 되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동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의 말씨 때문에 적잖게 오해를 받은 때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번은 문협 관계 일로 시청 문화예술과 직원들과 술자리를 한 일이 있었다. 마침 이상개 선생님이 시인협회 회장으로 계실 때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인사를 나누고 처음 몇 순배 술이 돌 때까지도 분위기가 그런대로 좋았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으셨던지 많이 마시는 것 같았고 그러자 예의 그 특유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과장, 계장, 모두에게 반말이었다. “어이, 술 무라. 술 안 묵고 머하노.”

이쯤 되자 과장, 계장은 인상이 틀어지기 시작했고 부하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한 직원이 잠시 나를 따로 만나자더니 따지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려고 저런 분을 모셔왔어요. 빨리 보내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나도 분위기를 짐작하던 터라 선생님께는 갖은 핑계를 대며 따로 보내드리고 다시 그 직원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뒤에 종종 그 직원들을 만나면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술이 약하다느니, 술버릇이 어떻다느니 하곤 하는데 그러면 나는 인간 이상개 그리고 사람 좋은 구분의 진면목에 대해서 강변하곤 했던 적이 있다.

또 한 번 술좌석에서의 일이다. 이충기 시집이 나온 얼마 뒤라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런데 그 시집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인세에 대한 문제로 약간 감정이 격양된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분 성격답게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고 나는 남의 일을 대신하는 입장이라 정확하게 하고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같은 말이 계속 되풀이되자 화가 나신 선생님께서는 손을 들어 내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나는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자꾸 따진데 대해 사과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오랫동안 찝찝하게 기억되는 사건이었다. 뒤에 생각해 보니 말씨가 꼬부라진 것을 감안 못한 것도 내가 맞을 이유였고, 그분 성격에 대해 남에게 절대 경제적 손실을 입히지 않을 분이란 생각을 못한 것도 내가 맞을 이유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근 10년 동안 그분이 술자리에서남과 다투면서 큰소리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걸 보아서라도 그때는 내가 맞을 짓을 한 게 분명했던 것이다.

이제 선생님의 회갑을 맞아 그동안 남다르게 닦아온 여러 업적들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 펴낸 수백 권의 시집들, 빛남출판사가 시인들의 어울림 마당에 되게 함으로써 서로 화합하게 만든 일등 공신으로서의 업적, 그러면서 꽤 괜찮은 시들을 담고 있는 시집들을 출간한 시인으로서의 위상, 이런 공적만으로도 선생님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인 그 출판사가 갈수록 번창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문인들이 처한 환경, 부산 출판계가 처한 입장을 보면 그럴 수 없어 정말 안타깝다. 그저 사모님 운영하시는 <한길>이라도 더 번창해 출판사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충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렵게 사시는 것도 한 번씩 흐트러지는 그분의 본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선생님의 회갑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우유부단을 위한 변명

 

 

최영철(시인)

 

 

우리는 철주계를 축으로 하는 우유부단과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상개 원류가 계신다

그 아래 최근 조직을 이탈하여

독자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원준 등 몇몇

밥 먹으러 가거나 술 마시러 가거나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다가

우유는 자를 수 없다

우유는 자를 수 없다

이 계보의 특성은 누가 뭐라 해도

식은 팥죽처럼 히히 웃는다는 것

속은 천불이 나도 히히 웃다가

만성두통으로 진전된다는 것

딱 부러져야 하는 신한국창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우유부단으로 일관하다가 어느 날

머리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우유부단은 즐겁다

삼라만상, 우유부단하지 않은 것이 무엇 있으랴

아침해는 뜰까 말까 겨누다가 뜨고

저녁 해는 질가 말까 주춤거리다가 진다

그 사이 새들은 지지 하다가 배배 하고

그 사이 개들은 컹컹 하다가 쿵쿵 한다

삼라만상, 말세의 예언까지 우유부단

구름 사이 햇볕까지 힐금힐끔

우유부단은 행복하다.

 

- 「풍자, 시인을 찾아서(정성욱)」

 

 

위의 시는 1993년 발표한 것으로 나의 「풍자, 시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연작 중 한 편이다. 어쩌다 보니 이 연작들의 대부분이 시집에서 빠지고 말았는데 아마 그때의 내 생각은 이 연작을 계속 써서 언젠가는 한권의 책으로 묶어보고자 했던 욕심을 냈던 것 같다. 이 시속에 이상개 선생님을 비롯한 허철주 최원준 정성욱 등의 부산 시인들이 등장하고, 나를 포함한 그 일군의 시인들을 우유부단파로 분류하고 있는데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릇 모든 시인은 우유부단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이 보면 기구에 불과할 온갖 고민들을 다 싸 짊어지고 끙끙대는 것이나 무엇 하나 단칼에 내치치 못하는 유약함은 시인에게 내려진 형벌이며 축복이다. 그 천 갈래 만 갈래로 교차하는 상념들 속에 작은 먼지 하나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일생을 온갖 번뇌로 살아야 하는 시인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기도 할 것이다. 정일근 시인은 나의 세 번째 시집 『홀로 가는 맹인 약사』의 발문에서 이런 우리를 일컬어 ‘만약 이들이 비극적으로 부산 중앙동에서 만나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술이라도 한잔 마시러 간다면 장소 결정에 하루해가 지고, 메뉴 결정에 진 해가 다시 밝아 올 것’이라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중차대한 이를 어찌 단칼에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상개 선생님은 그런 우유부단파 시인들의 좌장이 되실 만하다. 그 한 예로 ‘고시회’를 들 수 있다. 고시회는 고등고시 관련 모임으로 착각하거나, 거기에 참여한 시인들의 면면 때문에 高詩會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은 고도리시인회의 준말이다. 마주 앉기도 어려운 내로라하는 선배들을 모시고 우리의 천진무구한 악동 정일근 시인이 판을 펴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악동의 자리가 서규정 시인으로 바뀌었을 뿐 한 세기를 넘어 그 모임은 지금도 꾸준히 어이지고 있다. 변함없이 점 백의 심심풀이 화투판이지만 그 치열한 쟁투는 도통 식을 줄 모른다. 모든 문학적 성향과 문단의 파벌, 세대간의 장벽을 초월해 존속해 왔다는 점에서 이 고시회는 부산 시문학 야사에 남을 족적이 될 만하다.

물론 그 사이 이런저런 수난이 없지는 않았다. 출판사 직원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화투 장비들을 숨기고 버린 것도 몇 번이었다. 마지막에는 소파를 들어내고 회의용 탁자로 바꾸었는데 고시회는 그 핍박을 묵묵히 견뎌냈다. 고시회가 그런 고난을 무사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빛남출판사 대표 이상개 선생님의 우유부단에 힘입은 바 컸다. 직원들의 빗발치는 상소에 맞장구를 치시다가도 고시회 회원드링 하나 둘 찾아들면 선생님은 그 화투판의 정족수르 채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궁색한 출판사 살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역사와 시대의 질곡을 초월해 언제나 유유자적했던 고시회가 야속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시인들의 심신을 푸는 쉼터가 되어준 것도 출판 못지않게 큰일이 아니었던가 싶어 선생님의 우유부단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런 우유부단의 철학은 선생님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와 자유』20집(2000년 빛남)에 재수록한 시 중의 하나인 「철사를 위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구부러진 철사뭉치가

길바닥에 뒹굴며 붉으락푸르락 한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을 털어 내고

둘둘 감길 때만 하여도

곧게 뻗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미 깨닫고 체념했던 사실이지만

 

쇠붙이가 곧고 단단할 줄만 아는

그 똑똑하고 잘난 놈들 만나기만 하면

분통이 터져 끊어진다, 끊어진

마디마디는 총알이 되고 싶다.

 

가로 세로 걸치면 석쇠가 되고

또는 짐승이나 죄수를 가두는 철망이 되지만

통로를 차단하는 철조망도 되는 철사를

쓸모가 없어졌다고 함부로 푸대접 말라.

 

단단히 묶어주는 힘을 선사도 하고

꽉 막힌 구멍을 시원하게 뚫기도 하지만

고무풍선을 찔러도 터지지 않을 만큼

명주실만큼 유연성을 갖고 있는 철사.

 

철사를 구슬려 구부리고 또 구부리면

코끼리나 나무로 비행기로 혹은 물고기로

자유자재로 둔갑하는 재주를 뽐내는 철사.

 

우리는 아직도 철사의 힘을 모르고

외면하는 신의 얼굴만 찾으려 든다.

 

 

이 시는 선생님의 인생관을 함축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곧고 단단한 것이 결코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과, 가두고 차단하는 철망과 철조망이 아닌 가로 세로 걸치는 석쇠로서의 쓸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묶어주고 뚫어주는 힘보다 ’고무 풍선을 찔러도 터지지 않을‘ ’명주실‘같은 ’유연성‘을 가진 삶을 선생님은 지향해 온 듯하다. 구부리고 또 구부려 ’코끼리나 나무로 비행기로 혹은 물고기로‘ 넓게 쓰이고자 하는 것이 그런 바램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은 그 길이 곧게 뻗기만 하는 결단의 삶보다 몇 곱절 더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같은 계보의 말단인 나는 알고 있다. 외유내강, 밖의 부드러움이 안의 강함을 이기지 않고 안의 강함이 밖의 부드러움을 해치지 않는 삶의 태도는,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더없이 혹독한 仁者의 삶이 아니겠는가.

 

 

 

 

 

 

 

<한길>로 영원히

 

 

김형술

 

 

이상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게 91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이해웅 교수님으로부터 그 당시 부산문인협회 기관지였던 『문학의 세계』신인모집에 응모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원고를 보냈었고, 그게 채택이 되었으니 빛남출판사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회사 가까이 이상개 선생님의 빛남 출판사가 있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고 그곳에서 심사를 하셨다는 김성식 시인도 만나게 되었다. 활력이 넘치는 큰 목소리를 가진 김성식 시인에 반해 선생님의 첫 인상은 차분했고 별 말씀이 없으셨으며 온화하게 잘생긴 얼굴이라는 게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지금 발간되는 『문학도시』의 전신인 당시의 『문학세계』는 처음으로 신인을 뽑는다는 말씀과 함께 원고료(5만 원정도 쯤 되는 액수였던 것 같다)를 주셨다. 지금 같으면 그 돈으로 선생님께 술을 사드렸겠지만 시인이라는 존재들이 마냥 낯설고 어렵기만 했던 그 당시의 나는 고맙다는 말만 하고 빛남출판사를 나왔던 것 같다. 92년에 『현대문학』으로 다시 등단을 하고 시인들의 행사 말석에 말없이 앉아 있곤 하던 나는 회사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빛남출판사를 자주 들락거리면서 시인들과 면을 익히고 자연스럽게 시인사회의 분위기를 익히게 되었는데 이상개 선생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셨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어, 그래 밥 뭇나?”

“선생님 저 갑니다”

“그래, 잘 가라”

선생님은 이런저런 말씀이 별 없으셨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셨으므로 빛남에는 시인들, 시인지망생들의 출입이 잦았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빛남출판사에 들러 어쭙잖은 재주로 표지디자인을 하거나 새로 나온 시집들을 읽거나 이상개 선생님이 임명수, 김석규 시인들과 바둑을 두는 걸 구경하곤 했다.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와 다투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누구를 힐난하는 법이 없는,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순하신 분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 수 있었다.

어쩌다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면 얼굴이 약간 붉어지신 채 “허, 이거 참”하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면 그 뿐, 그걸 마음에 담거나 하시지 않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곤 했다. 인간의 선함은 주변가지 전염시켜서 순화시킨다는 것은 선생님이 말없이 보여 주신 큰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이유로 자주 손해를 보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걸 경우 주위에서 분개하거나 제발 좀 그러시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씀을 드려도 선생님은 “그래 알았다”하시고 나면 그 뿐, 도저히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실 줄 몰랐다. 선생님의 그런 성품이 사모님으로 하여금 시인들의 ‘쉼터’인 <한길>을 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임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어려운 출판사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계간지인 『문학지평』을 발행하고 계셨을 때였다. ‘저 양반 믿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팔을 걷어 부치고 가게를 열 준비를 하시는 사모님을 따라 국제시장을 순례하곤 한 것은 순전히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과 선생님의 그런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몇몇 주변과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서운한 마음 대문이기도 했다. 집기를 사고, 도배를 하고 전구를 사서 달고 하면서 좁은 공간을 나름대로 고심하며 꾸며가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냈다. 아무래도 사모님 혼자 꾸려나가기엔 손이 딸릴 테고, 그렇다면 젊은 시인들이 모여서 사모님을 도우면 어떨까. 그런 생각들을 주위에 이야기하자 모두들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중앙동에 어둠이 깔리고 샐러리맨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간쯤이면 요일별로 당번을 정한 시인들은 한길로 출근을 시작한다.

월요일은 최영철 시인, 화요일은 송유미 시인, 수요일은 나, 목요일은 서정원 시인, 금요일은 서규정 시인, 이런 식으로 당번을 맡은 시인들은 아무래도 가게를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뜸한 <한길>을 위해 주변의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른 바 술 마시러 나오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 그날의 가게 분위기는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모처럼의 지우가 찾아오는 바람에 당번직을 포기하는 대신 술을 마셔 매상을 올리려하다가 만취해버린 경우도 있고, 누구는 익숙하지 않은 당번직에 허둥대다가 계산을 잘못해 자기 호주머니를 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누구는 경쟁심이 발동하여 자기가 당번을 맡은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기 위하여 무리를 하는 등.

<한길>이 조금씩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자 젊은 시인들의 당번직은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정겹기 그지없는 시간들이었다.

<한길>이 그렇게 따뜻한 정으로 넘쳐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선생님이 그동안 주변과 후학들에게 베푸신 선의의 결과였다는 것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에게 흔하게 베풀 줄만 아셨지 자신의 어려움은 결코 말하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존재는 하나의 구심점과 같아서 중앙동의 시인사회는 따뜻하고 정겨웠다.

 

이 시인들의 사랑방을 <한길>로 지었다는 건 무척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상개 선생님 자신 시를 쓰시기 시작하면서 다른 것, 물질과 명예 따위에 욕심내지 않으셨고 다른 일에 한눈팔지 않으셨듯이 누가 묻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그저 묵묵히 시 쓰는 일을 천직으로 믿고 사시는 선생님의 의중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시 쓰는 일에 대한 마음가짐보다 어쩌면 허명을 얻는 일에 더 마음이 뺏길 수도 있는 많은 시인들에게 선생님의 태도는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백 마디의 말보다, 여러 편의 유장한 논설보다 더 큰 말없는 말씀을 선생님은 돌려주고 계신다. 요즈음 뵙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시간이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부산시단에 선생님이 가지신 자리가 빛남출판사와 함께, 그야말로 하나의 길, <한길>이 되어 영원히 남아있기를 기원해본다.

 

 

 

 

 

 

 

 

쑥부쟁이처럼 허허로운, 가을볕처럼 투명한 중앙동의 ‘거인’

 

 

강동수(소설가)

 

 

이상개 선생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 쑥부쟁이 울울하고 가을 볕 바른 산비탈, 듬성듬성한 솔밭 사이로 이따금 쑥국새 소리도 들리는 그런 적요하고 한가로운 풍경이다. 이 선생께서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쑥부쟁이처럼 허허로운, 양명한 가을볕처럼 투명한, 그리고 쑥국새처럼 적요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이상개 선생을 처음 뵌 것도 벌서 10년쯤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문청시절부터 가까이서 모셔온 다른 문우들에 비해선 오랜 세월이랄 것도 없으나, 그래도 10년의 시간이 그다지 짧은 것만도 아니다. 80년대 후반 직장 때문에 부산에 발을 들여놓게 된 나로선 부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뵙고 아직껏 모셔온 어른 들 중에 한분인 셈인 것이다. 처음엔 한두 번 인사를 드릴 정도였고, 그저 꽤 미남의 중견시인이구나 하는 느낌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91년쯤이던가 직장인 신문사의 문학담당 기자를 맡으면서 이 선생을 뵐 기회가 자주 생겼다.

알고 보니 그는 나의 고등학교 대선배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선생이 운영하시는 <빛남출판사>는 중견문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나는 취재를 핑계로 그의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있는 일이 잦았다. 임명수 시인, 김영준 시인, 김인환 시인, 김석규 시인 같은 분들이 벌이는 100원짜리 고스톱 판을 곁에서 구경하고 있으면, 허철주, 최영철, 서규정 같은 후배 시인들도 가끔 인사를 하러 들르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술판이 벌어지는 일도 많았다. 이런저런 고담준론에 씨알 없는 수다에 이르기까지 차수를 변경하면서 떠들다 보면 곤드레만드레가 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잘 자고 있는 사람들의 집으로 전화를 돌려대 전화고문까지... 요즘도 어쩌다 그때 생각이 나서 문우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고문을 시도해 보지만 전화를 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때보다는 좀 시들해진 것 같으니 이 도한 아쉬운 일이다.

어쨌거나, 내 개인적으로 소중한 한 시절이었던 그 무렵을 개인사(?)속에서 ‘중앙동시대’쯤으로 명명을 한다면, 그 중앙동 시대의 중심엔 언제나 이상개 선생이 있다. 사무실에서의 그는 주인의 체모를 지키느라 그랬는지 고스톱판엔 잘 끼지 않은 채 좀 뚱한(?)표정으로 일을 하고 계셔서 처음엔 무뚝뚝한 분인 줄로만 알았다. 고등학교 후배이자 취재차 출동한(?) 내게도 ‘응, 왔나?’ 하고 입을 닫으실 분이었다. 그러나 이선생의 표정만은 부끄럼 많은 소년 같은 수줍은 표정이어서 식(識)이 몹시 맑은 분이시겠구나 하는 느낌만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술집에 모시고 있으면 몇잔 술에 곧 얼굴이 붉어져서는 속에 담아둔 이런저런 살가운 말씀도 해주셨다.

내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일은, 93년 12월 어느날, 신춘문예 당선통보를 받고 감격(?)에 겨워 선생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마치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던 일이었다. 2차, 3차가지 술을 사주시면서 이런 저런 격려와 충고의 말씀을 해주셨던 일은 아직도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최영철 시인이 썼던 시에 ‘우리는 우유부단파...우유는 칼로 자를 수 없다’하는 구절이 더오른다. 그 시를 놓고 주당들은 우유부단파의 보스(?)가 누구냐는 설전이 벌어졌는데, 결론은 이상개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업으로 후배의 모범이 되어 오시는 것은 물론, 척박한 부산 현실에서 문학전문출판사로서의 입지를 닦으시느라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IMF이후 전반적인 불경기 속에서 선생께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심한 후배라는 자책이 들 때도 있다. 10년 전에만 해도 미소년(?)을 연상시키던 풍모이셨던데 세월의 힘은 이기지 못하는지 이젠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서너 달 전 사모님이 운영하시는 <한길>로 인사를 갔더니 일찌감치 약주가 되신 선생님께서 전에 없이 붙잡으셔서 늦도록 선생께 잔을 올린 적이 있다. 자세히 뵈니 전보다 한결 흰머리도 느셨고 이마며 목이며 주름살도 느신 것 같아 가슴이 좀 아팠다. 내 손등에 손을 얹으시며 ‘동수야, 동수야…’소리를 반복하시는 모습을 보며, 세월이란 것이 무상해서 선생께서도 이제 외로움을 타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선생께서 어느새 회갑을 맞으셨다니 한편으로는 축하의 말씀을 드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는 착잡한 감회도 생긴다. 하지만 선생의 60년은 약삭빠른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평생을 시업에 걸어온 시인만의 긍지와 자랑이 새겨진 훈장 같은 세월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위안도 받게 된다.

중앙동의 풍경이 이전 보다는 많이 쓸쓸해졌고, 나 역시 세월다라 약빠르게 변해가면서 마음뿐일 뿐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린다. 그저 언제까지나 건강하신 모습으로 좀 뚱하고, 좀 무뚝뚝하신 모습으로 후배들을 말없이 지켜봐 주시기를, 그리고 새로운 정열로 시업에 매진하시는 모습을 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가까운 선후배들과 함께 하루저녁 <한길>로 몰려가 선생을 모시고 진탕 술판을 벌이면서 허튼 소리도 하며 선생의 회갑을 축하해 드리고 싶다. 아니, 햇살 따뜻한 봄날 선생을 모시고 가까운 교외로 답청이나 나가 차가운 개울에 발을 담그고 탁족이나 하면서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의 시 한편을 다시 읊는 것으로 선생께 대한 헌사를 대신하고 싶다.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오늘도

내, 그대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는 별이 되는

하나의 이름으로 반짝이면서

그대와 내가 만난

최초의 아픔과

최초의 굶주림을

뼈 속 깊이깊이 새기면서’

 

 

- 「만남을 위하여」중에서

 

 

 

 

 

 

 

 

 

 

 

 

 

 

부산출판 문화의 역사 <빛남>과 이상개 선생님

 

 

배재경(시인)

 

 

이상개 선생님에 대한 내 기억은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의 무게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이상의 무게를 함축한다. 어려운 출판여건을 안고도 주변사람들의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곧잘 들어주는 성품을 보노라면 답답할 정도로 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 선생님만이 지니신 고귀한 성품인 것을.... 나는 잠시나마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가볍게 가진 것을 후회하고 내 짧은 소인배적인 사고를 스스로 질책한다.

 

빛남을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리라. 나는 빛남출판사에서 가장 소중한 젊음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곳에서 문학을 느끼고 출판과 주변부적 여러 가지 일들을 익히고 배웠다. 또 무수한 문인들과 예술인들을 만났으며 때로는 실망과 함께 크나 큰 절망을 느낀 곳이기도 하다.

처음 이상개 선생님을 뵈었을 때가 1989년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정일근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후 3년이 지나 김해의 지역신문사 일을 그만 두고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은 ‘나를 좀 도와주랴?’고 내 의향을 구했고 나는 출판사에 있으면 보다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1993년 1월 3일부터 출근했다.

이후 선생님과 함께 한 6년여 동안 즐거운 일들이라면 불구의 몸으로 시를 쓰는 이충기 시인의 시집을 간행, 주변 지인들을 통해 판매, 도움을 준 일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학잡지 발간을 해왔다는 것, 그리고 전국의 서점들을 돌아보며 우리나라 출판유통의 현주소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남>을 애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부산출판계에서 1990년대는 <빛남>의역사가 부산출판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만큼 ,빛남>은 부산지역의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집을 발간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작가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부산의 작가가 아닌 전국의 작가가 되도록 전국의 크고 작은 서점들과 영업망을 확보하여 부산의 책을 보급하는데 앞장서왔다.

 

책을 보급하는 과정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빛남을 창립하고 난 뒤 얼마 뒤 김 종 시인의 병상의 아내를 생각하며 쓴 『아내라는 이름으로』라는 시집을 만들었으나 서점배본이 문제였다. 당시 정일근 시인이 가까이 있어 여성지와 신문 등에 기사를 타전하면서 상당한 독자를 양산한 상태였으나 서점에 책이 없다며 출판사로 문의가 몰려왔다. 할 수 없이 선생님이 직접 서울의 서점에 거래개설을 요청하려 상경했으나 지방출판사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책을 받으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서러움의 눈물을 훔치며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할지 난감했다고 털어놓으셨다.

 

실제 당시 부산의 큰 도매상이 대청동에 있었는데 걸어서 5분 거리의 빛남 책을 서울의 도매상에 주문을 내면 서울 도매상에서는 다시 부산의 빛남출판사로 주문을 하고 주문된 책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부산의 도매상으로 내려와 시중에 유통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한동안 겪기도 했다. 같은 도시의 도매상에서도 지방출판사를 외면해 온 것이 한국출판유통의 난맥상이었던 것, 하지만 선생님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국의 130여 곳의 서점과 거래선을 트며 그들에게 ‘부산의 책도 팔릴 수 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셨다. 이 시기 많이 팔린 책들이 김 종 시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정민기의 『비가 오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이광용의 『짧은 사랑 긴 이별』이충기의 『기다리는 나무』, 역사책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등이다. 모두 1만부에서 최고 5만부가지 판매고를 올려 전국의 서점에서도 빛남을 결코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빛남의 이러한 성공은 전국서점에 ‘부산의 책들도 팔린다’와 나아가 ‘지방출판사의 책도 팔린다’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큰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후발주자의 출판사들이 전국서점으로 책을 보급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 결국 빛남이 지방출판사 전체의 이미지를 확 바꿔버리는 리더역할을 톡톡히 치루었던 셈이다.

아직도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들러 서점사람들을 만나 <빛남>을 얘기하면 “아! 시집 많이 팔았던 출판사 말이죠?”하며 기억한다.

 

6년여의 길다면 긴 시간동안 내 손을 거쳐 간 책들만 해도 200종이 넘는다. 빛남 전체의 책 발간 종수는 정확한 집계를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4~5백종은 족히 되리라. 부산의 시인들치고 2명중 한명은 빛남에서 시집을 발간하고 전국서점의 루트도 활용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것은 부산출판의 산역사인 빛남을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활성화 시켜놓지 못하고 그만 둔 일이다. 나름의 고충이야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게으른 습성 탓이었던 것만 같아 선생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물론 경제공황이 닥치기도 했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달리 가지고 운영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어쨌든 빛남은 내 친정인 셈이다. 앞으로 빛남이 잘되면 덩달아 즐거울 것이고 우울한 얘기라도 들리면 내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때는 다시 돌아가 새로 시작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 같아 일단 유보했다 또 나에게도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할 시간이 필요하다. 돌이켜보건 데 빛남의 추억들을 정리하자면 너무나 많아 쉬이 끝날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그 동안 내가 보아온 그 많은 사람들의 면면들과 그 분들이 엮어가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는 모습들을…

 

이제 선생님이 회갑을 맞이한다니 축하와 더불어 걱정도 앞선다. 홀로 묵묵히 지키고 계실 사무실의 공허가 얼마나 깊고 쓸쓸할지를 누구보다도 나는 짐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여 제발 우리들 자신을 외롭게 하지 마시기를…